2007년 06월 06일
세종과 최만리의 유명한 논쟁에 대하여
세상이 그리 만만하더냐?
원래는 댓글로 쓰다가 너무 길어져서 따로 트랙백으로 씁니다 ^^:
훈민정음의 창제에 관하여 사실 여러 이야기들이 있습니다만, 저는 기본적으로 실록의 이야기를 기초로 하여 당시 사정을 이해하는 것이 당시 최만리와 세종과의 갈등을 보는 데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훈민정음을 창제 하는 데 있어서 거의 모든 것을 세종이 직접 하였고-믿을 수 없다는 분들도 많습니다만, 국문학자들의 연구와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세종의 독자적인 창제가 사실에 부합한다고 생각합니다- 최만리등은 언문을 만드는 데 극렬하게 반대하고 있음이 보입니다.
실제로 그 유명한 상소문에서 최만리는 언문의 사용은 물론이고, 제작 자체가 중화의 도를 거스름이라고 생각하여 극렬하게 반대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 우리 조선은 조종 때부터 내려오면서 지성스럽게 대국(大國)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中華)의 제도를 준행(遵行)하였는데, 이제 글을 같이하고 법도를 같이하는 때를 당하여 언문을 창작하신 것은 보고 듣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설혹 말하기를,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뜬 것이고 새로 된 글자가 아니라.’ 하지만,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날의 전문(篆文)을 모방하였을지라도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 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데가 없사옵니다.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사오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 옛부터 구주(九州)의 안에 풍토는 비록 다르오나 지방의 말에 따라 따로 문자를 만든 것이 없사옵고, 오직 몽고(蒙古)·서하(西夏)·여진(女眞)·일본(日本)과 서번(西蕃)의 종류가 각기 그 글자가 있으되, 이는 모두 이적(夷狄)의 일이므로 족히 말할 것이 없사옵니다. 옛글에 말하기를, ‘화하(華夏)를 써서 이적(夷狄)을 변화시킨다.’ 하였고, 화하가 이적으로 변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역대로 중국에서 모두 우리 나라는 기자(箕子)의 남긴 풍속이 있다 하고, 문물과 예악을 중화에 견주어 말하기도 하는데, 이제 따로 언문을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이적과 같아지려는 것으로서, 이른바 소합향(蘇合香)을 버리고 당랑환(螗螂丸)을 취함이오니, 어찌 문명의 큰 흠절이 아니오리까.
(중략) 하물며 이두는 시행한 지 수천 년이나 되어 부서(簿書)3702) 나 기회(期會)3703) 등의 일에 방애(防礙)됨이 없사온데, 어찌 예로부터 시행하던 폐단 없는 글을 고쳐서 따로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를 창조하시나이까. (중략) 만약에 언문을 시행하오면 관리된 자가 오로지 언문만을 습득하고 학문하는 문자를 돌보지 않아서 이원(吏員)이 둘로 나뉘어질 것이옵니다. 진실로 관리 된 자가 언문을 베워 통달한다면, 후진(後進)이 모두 이러한 것을 보고 생각하기를, 27자의 언문으로도 족히 세상에 입신(立身)할 수 있다고 할 것이오니, 무엇 때문에 고심 노사(苦心勞思)하여 성리(性理)의 학문을 궁리하려 하겠습니까. 이렇게 되오면 수십 년후에는 문자를 아는 자가 반드시 적어져서, 비록 언문으로써 능히 이사(吏事)를 집행한다 할지라도, 성현의 문자를 알지 못하고 배우지 않아서 담을 대하는 것처럼 사리의 옳고 그름에 어두울 것이오니, 언문에만 능숙한들 장차 무엇에 쓸 것이옵니까. 우리 나라에서 오래 쌓아 내려온 우문(右文)3704) 의 교화가 점차로 땅을 쓸어버린 듯이 없어질까 두렵습니다."
-세종 26년,1444 갑자년 2월 20일
이에 대해 세종은 아래와 같이 답합니다.
“너희들이 이르기를, ‘음(音)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한 것이 모두 옛 글에 위반된다.’ 하였는데, 설총(薛聰)의 이두(吏讀)도 역시 음이 다르지 않으냐. 또 이두를 제작한 본뜻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 아니하겠느냐. 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라면 이제의 언문은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한 것이다. " -세종 26년,1444 갑자년 2월 20일
여기에서 보듯이 둘의 입장차이는 단지 음운의 차이에 대한 서로의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이후 훈민정음의 반포에서 나타난 세종의 생각은 이미 창제당시와 최만리의 상소에 대한 답에서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죠.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 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
그리고 최만리의 반대상소와 훈민정음의 창제가 완료된 시기의 시간적인 비교를 하자면 실록의 기사가 세종 25년인 1443 계해년 12월 30일 입니다. 반대 상소가 다음해 2월 20일이고 말이죠.
집현전 학자들이 언문, 즉 훈민정음과 관련된 일은 거의 미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종 26년 1444년 갑자 2월 16일의 "집현전 교리 최항·부교리 박팽년 등에게 언문으로 《운회》를 번역하게 하다"라는 실록의 기사와 이후의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에게 무엇을 시켰는 지에 대한 실록의 기사를 보면, 세종이 창제한 글자를 정식으로 반포하기 이전, 테스트(?)를 목적으로 번역을 한 것 뿐이지요.
사실 대중적으로 떠도는 이야기가 많은 경우 윤색되고 왜곡되는 경우도 있으나, 적어도 최만리와 세종의 경우는 지금 대중적으로 통용되는 설이 대체로 사실에 부합된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세종의 창제목적은 발음을 쉽게 함으로서 한문 교육의 수월성과 백성들의 편리함을 도모함을 위함이었지, 최만리의 반대등에 생각을 바꾸어 훈민정음으로 반포한 것이 아닙니다. 세종의 관점을 보여주는 곳은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 라고 정창손에게 하교한 것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이런 실록의 사실에서 세종과 최만리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 지가 분명하게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글 쓰신 의도가 세종시대 신하와 군주간의 치열한 토론이 오히려 당시 문물의 발전에 기예하셨다는 데 있으신 줄 압니다만, 당시 "훈민정음"에 있어서 최만리등의 보수주의학자들과 세종의 갈등은 단순한 토론이 아니라 서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데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사대주의에 관해서는 세종역시 기본적인 관점은 유학자의 그것에 동일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포스팅에서 쓰신 것처럼 오히려 세종이 본질적인 사대-중화와의 일체-를 체현하고 있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문자이외에도 중국의 것과 다른, 예약등의 정립에 있어서 우리의 고유한 것을 제대로 세우려고 했던 세종에게 '최만리와 다를 것이 없다'라고 하는 것은 세종대왕을 오히려 폄하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 최만리가 '언문'의 연구에 공헌하고, '언문'의 사용 자체에 동의했다는 것은 세종이 춘추전국시대의 예를 들어 군왕의 뜻과 다르다면 떠나면 될것이다 라고 경고함에도 불구하고 그 뜻을 굽히지 않았던 최만리의 진의를 왜곡하는 것이 아닐까요.)
원래는 댓글로 쓰다가 너무 길어져서 따로 트랙백으로 씁니다 ^^:
훈민정음의 창제에 관하여 사실 여러 이야기들이 있습니다만, 저는 기본적으로 실록의 이야기를 기초로 하여 당시 사정을 이해하는 것이 당시 최만리와 세종과의 갈등을 보는 데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훈민정음을 창제 하는 데 있어서 거의 모든 것을 세종이 직접 하였고-믿을 수 없다는 분들도 많습니다만, 국문학자들의 연구와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세종의 독자적인 창제가 사실에 부합한다고 생각합니다- 최만리등은 언문을 만드는 데 극렬하게 반대하고 있음이 보입니다.
실제로 그 유명한 상소문에서 최만리는 언문의 사용은 물론이고, 제작 자체가 중화의 도를 거스름이라고 생각하여 극렬하게 반대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 우리 조선은 조종 때부터 내려오면서 지성스럽게 대국(大國)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中華)의 제도를 준행(遵行)하였는데, 이제 글을 같이하고 법도를 같이하는 때를 당하여 언문을 창작하신 것은 보고 듣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설혹 말하기를,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뜬 것이고 새로 된 글자가 아니라.’ 하지만,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날의 전문(篆文)을 모방하였을지라도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 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데가 없사옵니다.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사오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 옛부터 구주(九州)의 안에 풍토는 비록 다르오나 지방의 말에 따라 따로 문자를 만든 것이 없사옵고, 오직 몽고(蒙古)·서하(西夏)·여진(女眞)·일본(日本)과 서번(西蕃)의 종류가 각기 그 글자가 있으되, 이는 모두 이적(夷狄)의 일이므로 족히 말할 것이 없사옵니다. 옛글에 말하기를, ‘화하(華夏)를 써서 이적(夷狄)을 변화시킨다.’ 하였고, 화하가 이적으로 변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역대로 중국에서 모두 우리 나라는 기자(箕子)의 남긴 풍속이 있다 하고, 문물과 예악을 중화에 견주어 말하기도 하는데, 이제 따로 언문을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이적과 같아지려는 것으로서, 이른바 소합향(蘇合香)을 버리고 당랑환(螗螂丸)을 취함이오니, 어찌 문명의 큰 흠절이 아니오리까.
(중략) 하물며 이두는 시행한 지 수천 년이나 되어 부서(簿書)3702) 나 기회(期會)3703) 등의 일에 방애(防礙)됨이 없사온데, 어찌 예로부터 시행하던 폐단 없는 글을 고쳐서 따로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를 창조하시나이까. (중략) 만약에 언문을 시행하오면 관리된 자가 오로지 언문만을 습득하고 학문하는 문자를 돌보지 않아서 이원(吏員)이 둘로 나뉘어질 것이옵니다. 진실로 관리 된 자가 언문을 베워 통달한다면, 후진(後進)이 모두 이러한 것을 보고 생각하기를, 27자의 언문으로도 족히 세상에 입신(立身)할 수 있다고 할 것이오니, 무엇 때문에 고심 노사(苦心勞思)하여 성리(性理)의 학문을 궁리하려 하겠습니까. 이렇게 되오면 수십 년후에는 문자를 아는 자가 반드시 적어져서, 비록 언문으로써 능히 이사(吏事)를 집행한다 할지라도, 성현의 문자를 알지 못하고 배우지 않아서 담을 대하는 것처럼 사리의 옳고 그름에 어두울 것이오니, 언문에만 능숙한들 장차 무엇에 쓸 것이옵니까. 우리 나라에서 오래 쌓아 내려온 우문(右文)3704) 의 교화가 점차로 땅을 쓸어버린 듯이 없어질까 두렵습니다."
-세종 26년,1444 갑자년 2월 20일
이에 대해 세종은 아래와 같이 답합니다.
“너희들이 이르기를, ‘음(音)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한 것이 모두 옛 글에 위반된다.’ 하였는데, 설총(薛聰)의 이두(吏讀)도 역시 음이 다르지 않으냐. 또 이두를 제작한 본뜻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 아니하겠느냐. 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라면 이제의 언문은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한 것이다. " -세종 26년,1444 갑자년 2월 20일
여기에서 보듯이 둘의 입장차이는 단지 음운의 차이에 대한 서로의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이후 훈민정음의 반포에서 나타난 세종의 생각은 이미 창제당시와 최만리의 상소에 대한 답에서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죠.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 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
그리고 최만리의 반대상소와 훈민정음의 창제가 완료된 시기의 시간적인 비교를 하자면 실록의 기사가 세종 25년인 1443 계해년 12월 30일 입니다. 반대 상소가 다음해 2월 20일이고 말이죠.
집현전 학자들이 언문, 즉 훈민정음과 관련된 일은 거의 미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종 26년 1444년 갑자 2월 16일의 "집현전 교리 최항·부교리 박팽년 등에게 언문으로 《운회》를 번역하게 하다"라는 실록의 기사와 이후의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에게 무엇을 시켰는 지에 대한 실록의 기사를 보면, 세종이 창제한 글자를 정식으로 반포하기 이전, 테스트(?)를 목적으로 번역을 한 것 뿐이지요.
사실 대중적으로 떠도는 이야기가 많은 경우 윤색되고 왜곡되는 경우도 있으나, 적어도 최만리와 세종의 경우는 지금 대중적으로 통용되는 설이 대체로 사실에 부합된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세종의 창제목적은 발음을 쉽게 함으로서 한문 교육의 수월성과 백성들의 편리함을 도모함을 위함이었지, 최만리의 반대등에 생각을 바꾸어 훈민정음으로 반포한 것이 아닙니다. 세종의 관점을 보여주는 곳은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 라고 정창손에게 하교한 것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이런 실록의 사실에서 세종과 최만리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 지가 분명하게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글 쓰신 의도가 세종시대 신하와 군주간의 치열한 토론이 오히려 당시 문물의 발전에 기예하셨다는 데 있으신 줄 압니다만, 당시 "훈민정음"에 있어서 최만리등의 보수주의학자들과 세종의 갈등은 단순한 토론이 아니라 서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데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사대주의에 관해서는 세종역시 기본적인 관점은 유학자의 그것에 동일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포스팅에서 쓰신 것처럼 오히려 세종이 본질적인 사대-중화와의 일체-를 체현하고 있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문자이외에도 중국의 것과 다른, 예약등의 정립에 있어서 우리의 고유한 것을 제대로 세우려고 했던 세종에게 '최만리와 다를 것이 없다'라고 하는 것은 세종대왕을 오히려 폄하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 최만리가 '언문'의 연구에 공헌하고, '언문'의 사용 자체에 동의했다는 것은 세종이 춘추전국시대의 예를 들어 군왕의 뜻과 다르다면 떠나면 될것이다 라고 경고함에도 불구하고 그 뜻을 굽히지 않았던 최만리의 진의를 왜곡하는 것이 아닐까요.)
# by | 2007/06/06 21:48 | 역사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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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께서 12월에 창제를 하시고 2월에 운해를 번역하게 하는데 여기서 운해가 어떤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위의 상소는 운회언해 때문인데 운해란 중국 한자 원어발음집입니다. 一二三을 쓰고 우리가 일이삼이라고 읽었던 것을 이얼산으로 기록하게 하는 것입니다. 최만리가 세종대왕과 트러블을 일으킨 때는 바로 이때부터 입니다. (상식적으로도 12월에 글 만들었다고 깜짝 발표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학자들에게 2월에 바로 번역작업을 맞겼다? 이것도 문제가 있고 12월에 발표할때는 일언반구 없다가 2월에 운해 번역을 맞기고 나니까 난데없이 20일에 상소를 올리는 것도 이상하다고 보지 않으시는지요. 매일 궁에 출퇴근 하는 관리가 말입니다.)
이미 세종대왕께서는 오래전 부터 원어발음에 상당히 집착하셨죠. 학자로서 당연한 집착이라 생각됩니다. 또 이런 성향은 48년 간행된 동국정운 등에서도 꾸준히 나타납니다. 학자들의 반대로 발음을 중국식으로 바꾸려는 노력이 좌절된 이후에도 끊임없이 중국식 발음으로 바꾸려고 하셨다는 거죠.
그리고 세종대왕께서 많은 업적들의 대부분은 유학의 기반에서 유학적 국가관을 수립하기 위한 것들이 많습니다. 즉 중국과 달라 유학이 스며들기 어려운 부분에 우리의 방식과 혼합하여 유학적 마인드를 세우려고 하신거지 완전히 새로운 것이나 혹은 중국의 사상과 완전히 반하는 독자적 내용을 수립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사대라는 측면에서 유사하다는 거죠.
최만리가 골수 사대주의자라면 왜 세종의 운해 번역에 극구 반대하고 나서겠습니까? 되려 중국과 같은 발음을 하게 됨으로서 정말 중국의 문화를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사건인데 말입니다. 즉 당시 중국의 유학의 마인드 하에 어느것을 우선하고 어느것을 퇴보시킬것에 대한 학자로서의 논쟁이지 세력갈등이라고 보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애초에 당시 정황적으로 최만리가 그런 반대로 인해 얻을 정치적 이익이 없으니까요. 자칫 반왕으로 삼족이 멸할 수도 있는 부분입니다
음... 글을 쓰다보니 상당히 길어져 버렸네요. 혹여 반론이나 의문이 있으시면 다음 부터는 트랙백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이글루스로 되돌아 온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연속 토론 트랙백이 좀 곤란했거든요. 양해 부탁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