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창제, 최만리 창제 협력설은 어떻게 나왔는 가? 역사

  아래 글을 쓰다가 잠시 검색해 본 결과,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최만리를 한글 창제에 반대한 학자가 아니라 한글 창제에 공헌했고 세종의 한글 창제는 단순히 중국과의 음을 동일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시작한 정책이 빗나가서 탄생한 "오발탄"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과연 어디서부터 이런 이야기가 나온 것일까요?
  좀 더 검색을 해보니, 아마 이런 이야기의 원 출처라고 생각되는 글이 하나 보입니다. 
  문학박사 황재순 박사라는 분의 글로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01&articleId=628141) 최만리가 어떤 한글 학자의 일제시대의 일본학자 "고쿠라 진페이"가 쓴 논문의 일부를 확대 해석으로 인하여 "엄청 나쁜 사람"으로 인식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이 진실인지? 하나 하나 따져 보도록 합시다.

  1. 한글을 누가 창제 했나?
"당시에 발음기호 즉 한글 개발 작업은 최만리 지휘하에 착착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집현전 귀신인 최만리가 그 일을 모를 리가 없고 세종의 신임 또한 두터웠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을 종합해 보건대 최만리가 한글 개발 실무팀의 대장이었음이 분명하다. 최만리 이하 집현전의 학자들은 세종이 새로운 옥편에 사용할 발음기호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구나 하는 정도로 이해하였고, 세종의 속셈이 우리 나라의 한자 발음을 명나라 한족의 중국어 발음으로 바꾸는 데에 있다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였다. 따라서 집현전 학자들은 최만리의 지휘하에 순조롭게 발음기호를 하나하나 만들어 갔고, 드디어 1443년 음력 12월에 완성이 되었다. " - 황재순

  위 글은 "집현전 귀신인 최만리가 한글 창제를 모를 리가 없고 세종의 신임이 두터웠기 때문에" 당시 상황을 종합해보면 최만리가 한글 창제의 총 책임자라고 추정(!)하고 있다. 과연 이게 옳은 것인가?

  하지만 실제로는 한글 창제와 집현전은 전혀 관계가 없다. 당시 조정에서 유일하게 한글과 연관된 곳은 정음청 [正音廳]으로, 이것도  창제 후 바로 설치되었던 것으로 적어도 창제되는 동안에는 조정내에 어떤 기관도 공식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 글의 주장처럼 집현전이 창제 당시부터 한글 제작에 밀접하게 관계 되었다면 어째서 정음청을 따로 설치한 것인가. (혹시 최만리등의 상소문이 나온 이후에 집현전내의 일부 세력이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했기 때문에 정음청을 세운 것이 아니냐고 묻는 경우가 있을 지도 모르지만, 정음청의 설치가 상소문보다 먼저라는 점에서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최만리의 상소문 자체에서도 이제 넓게 여러 사람의 의논을 채택하지도 않고 갑자기 이배(吏輩) 10여 인으로 하여금 가르쳐 익히게 하며, 또 가볍게 옛사람이 이미 이룩한 운서(韻書)를 고치고 근거 없는 언문을 부회(附會)하여 공장(工匠) 수십 인을 모아 각본(刻本)하여서 급하게 널리 반포하려 하시니, 천하 후세의 공의(公議)에 어떠하겠습니까." 라고 함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상소를 통해 한글 창제가 세종의 독단적 행동이었음을 비난하고 있다.  과연 자신들이 훈민정음의 창제에 직접적으로 관여 했다면 이런식으로 비난을 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관해서 기존의 연구자들의 코멘트를 들어보자
  
   박종국 (세종기념사업회 회장) 
   => 최만리도 훈민정음 창제한 것을 그때 안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왜냐면 그 전에 그런 기록이 없고 집현전이라면..부제학이라면 실제 실무담당 책임자다....미리 알았으면 그런 게 벌써 나오지 그때 나왔다는 것은 그분이 전혀 모르신 게 아닌가?  집현전의 최고 책임자였던 최만리가 한글 창제를 몰랐다면, 창제 과정에 집현전 학자들이 참여했다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일까?  한글 창제에 간여한 것으로 알려진 학자는 정인지, 최항, 신숙주, 성삼문 등 모두 일곱 사람이다. 반대 상소를 낸 학자들이 원로라면, 이들은 대부분 젊은 나이로 소장학자에 속한다. 집현전 7학사라고도 불리는 이들의 이름은 조선시대 문헌에서도 자주 언급되고 있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성현'의 용재총화로 세종이 신숙주, 성삼문에게 명해 언문을 지었다는 것이다. 집현전 7학사 가운데서도 한글 창제와 관련해 가장 주목을 받는 학자는 신숙주다. 세종의 총애를 받았을 뿐 아니라, 한글 관련 사업에 가장 많이 동원된 사람이 바로 신숙주였기 때문이다. 신숙주는 외국어에도 능통했다고 알려져 있다. 치나어, 니혼어 등 5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 같은 사실도 그가 한글 창제에 참여했을 거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신숙주의 문집인 보한제집에는, 그의 행적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신숙주가 직접 쓴 글을 비롯해, 당대 학자들이 기록한 그의 일대기가 실려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한글 스물 여덟 글자를 만든 것은 세종이라고 적고 있다. 신숙주가 한 일은 세종의 명을 받아 한글 서적을 편찬하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동안 학자들이 주목한 것은 신숙주가 요동에 다녀왔다는 기록이다. 그 무렵 요동에 귀양 와 있던 치나의 언어학자 황찬을 만나기 위해, 성삼문과 함께 여러 차례 요동을 방문했다는 것이다. 신숙주가 황찬을 만난 것은 훈민정음 창제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서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강창석 교수 (충북대 국문학과)
⇒ 질문 한 것은 한글을 만드는 문제에 대해서 질문 한 것이 아니고, 한자를 바로 잡기 위해서 한자음에 관한 질문을 하러 간 것이다. 한자음에 대한 이론인 성운학에 관해 질문 하러 간 것이지, 한글을 만드는데 어떤 직접적인 조언을 얻기 위해 간 것이 아니다. 그 연도 등은 조선실록을 보면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성삼문이 요동에 간것은 1445년 1월로 한글 창제후 1년 2개월인 것이다.)

  훈민정음에 관한 책 중에, 현재 전해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은 훈민정음 해례본인데, 여기에서도 전하창제(殿下創制)라는 부분이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 혹자는 이렇게 물을 지도 모른다. 신하들과 함께 만들었어도 임금이 명한 것이니 그렇게 명시한 것 아니냐고 말이다. 하지만 세종조 시대, 세종이 명한 많은 사업중에서 임금이 직접 했다고 명시한 것은 훈민정음 뿐이다. 당시 조선의 건국초여서 각종 제도와 문물, 기구등의 사업이 많이 실행되었는 데. 그것들은 모두 일일이 책임자들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아무리 공을 임금한테 돌리기 위해 했다고 하더라도 당시엔 최만리등의 상소를 보면 알수 있듯이 훈민정음의 창제는 임금의 업적을 기릴만한 "공"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하창제(殿下創制)라고 한 것은 실제로 세종이 훈민정음의 창제를 도맡다 시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이는 최만리의 상소 자체에서도 증명되는 데, "이번 언문은 새롭고 기이한 한가지 재주에 지나지 못하는 것으로 학문에 방해됨이 있고 정치에 유익함이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옳은 것이 없습니다."라고 '언문'의 창제는 신기한 재주를 부린 것에 불과한 것으로 전혀 유익할 것이 없다고 혹독한 비판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세종은 최만리가 이두로 충분하는 데 언문을 만든 것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 "너희가 설총은 옳다고 하면서 제 군주가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까닭이 무엇이냐?" 라고 하여 설총이 만든 이두는 옳다고 하면서 제 군주가 한 일을 그르다고 하는 까닭이 무엇이냐며 반박하고 있다. 이는 스스로 자신이 '언문'을 만들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어떤 기록에도 한글 창제를 다른 사람에게 명했다던지 도움을 받았다는 기록을 전혀 찾을 수 없다.특히 이 같은 이 사실은 훈민정음 서문의 글을 통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또 혹자는 아무리 그래도 믿을 수 없다, 어찌 세종 혼자 만들 수 있었겠는 가? 라고 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 세종은 스스로 음운학의 대가로서 집현전 부제학인 최만리를 앞에 두고 "또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 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 라고 면박을 준다. 세종의 다른 말에는 일일이 반박하던 최만리도 여기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세종을 도와 한글의 반포에 도움이 된 것은 왕자와 옹주들이었다. 최만리등의 기존의 집현전 노학들이 한글과 관련되어 있는 일은 '언문' 창제에 극렬한 반대를 한 것 뿐이지만, 왕자와 옹주들의 역할은 '언문'의 첫 적용대상이 된 "운회"의 번역등의 한글 서적 제작에서 민간의 언어에 대한 '언문'의 실제 적용까지 이르렀다. 

2. 세종은 왜 한글을 만들려고 하였는 가?
  황재순 박사의 글은 세종의 한글 창제의 의도를 한자 발음의 완전한 중국과의 동화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만일 완전한 중국과의 한자어의 동일화라면 중국의 운서를 수입하여, 그것에 사용된 발음기호를 그대로 이용하면 될일인 것이다. 
  훈민정음이 한자음 발음체계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은 창제된 이후 우리 한자음체계에 부합되는 한국의 운서의 편찬인데 그 첫번째 것이 1447년(세종 29)에 완성된 동국정운(東國正韻)으로, 황재순 박사의 주장과는 달리 고유의 한자음을 그대로 싵고 있다.
  이런 한자음의 정비보다도 세종이 더욱 중요시 생각했던 것은 따로 있었다. 최만리의 상소문에서 세종이 이전에 언급한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이라는 대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정창손은 이에 대해 백성들이 글을 듣는 다고해서 충신,효자,열녀가 나오겠냐고 반박했다가 세종의 분노를 사서 유일하게 파직되었다.) 세종은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교화시키는 데에 있었다. 실제로 세종 10년, 백성이 제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진주에서 발생하자 충격을 받은 세종은 삼강행실도를 펴되, 글과 함께 그림을 삽입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글자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그림만으로는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안타까워 하며 글자 창제의 필요성에 대해서 최초의 언급을 하였고, 이런 언급은 훈민정음의 반포시 "백성"과 "글자"라는 것이 다시 언급되면서 세종의 글자 창제에 대한 일관적인 관점을 보여준다.

3. 그렇다면 어째서 최만리가 한글 창제에 관여했다는 말이 떠도는 가?
  대단히 죄송스러운 말이지만, 최만리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있다는 저 황재순 박사라는 분의 글은 대부분 해주 최씨라고 밝히고 있는 분들이 인터넷상에서 퍼다 나르고 있었다. 한국인이 가장 자랑스러워 하는 한글 창제를 극렬하게 반대했다고 하여 일순 민족의 반역자, 대책없는 사대주의자로 조상이 비난받는 것을 좋아할 후손이 어디 있겠냐마는 사실과 다른 이런 글이 떠돌아 다니는 것은 도저히 납득되지도 용납될 수도 없다.
  황재순 박사라는 분은 최만리가 청백리고 꼿꼿하며 오랬동안 집현전에서 학문연구만을 종사했다는 점을 높게 평가하고 있는 데 설령 그렇다고 해도 최만리가 한글 창제에 전혀 기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격렬하게 임금을 면전에서 비판할 정도로 반대했다는 점은 묻히지 않는 다. 혹 최만리의 이런 관점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는 분이라면 당장 인터넷으로 공개 열람이 가능한 세종실록 103권, 26년( 1444 갑자 / 명 정통(正統) 9년) 2월 20일 경자 1번째기사를 보라. 정말 보는 사람이 낯이 뜨거울 정도로 최만리는 임금을 비판해대고 있다. 이것이 최만리가 주장한 것처럼 중화와 관련된 민감한 문제였기에 세종은 최만리등에 대해 심한 처벌을 할 수 없었지만, 사실 왕정국가에서 이정도의 비판은 도를 넘어선 것이다.

  한글이라는 문자의 대단함이 오히려 세종이라는 한 국가의 통치자이자 당대 최고의 언어학자의 업적을 가려버리는 이 상황은 특정 집단에 의해 왜곡되어서는 안된다. 역사는 사료로서 말하는 것이지 후대인의 짐작이나 추측으로서 재구성 하는 것은 소설일 뿐이다. 후손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최만리 자신에게는 한글을 사용하는 것은 오랑캐가 되는 것일 뿐이고, 그 당시에는 일견 타당한 점도 있는 것이다. 오히려 위의 글처럼 후세들이 의도적으로 사료를 왜곡하여 역사의 진실을 가리는 것은 조상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욕보이는 것이다.

참고: http://blog.daum.net/spacetrip/184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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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파파울프 2007/06/07 17:35 #

    음... 제가 잘못된 정보로 글을 썼군요...더 공부가 필요하겠습니다.
  • skrmsp 2009/04/01 07:18 # 삭제

    참 옳은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자슥들이 한글창제를 집현전 학자들과 협력해서 만들었다는 허황된 글을 올리나요
  • 황재순 2011/10/09 01:51 # 삭제

    당시 세종대왕이 왕세지에게 정무를 대리청정으로 맡겨놓고 발음기호 제작에 거의 매일 밤낮으로 매달렸으니 훈민정음 제작의 실질적인 기획 및 진행자임은 누구도 토를 달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거의 매일 시간외근무를 하면서 밤새는 집현전 소속 공무원의 상황에 대해서 최만리가 몰랐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최만리가 훈민정음 창제의 지휘자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세종의 원활한 업무진행에 도움을 준 것은 확실하다고 봅니다./동국정운에 나오는 한자발음 표기는 현재의 한자발음과 다른 것이 많고 또한 성조 표시를 위한 방점은 우리말 고유어에는 불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서서히 나중에 방점이 없어지기는 했지만... 사관들이 사초를 집필할 때에 운서 만드는 사실을 더 중시하고 발음기호 훈민정음 관련 업무는 큰 신겨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세세히 기록으로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이러저러한 논란이 너올 수 있었던 것이지요.. 세종대왕의 한자발음정책이 세계화 차원에서 보면 결코 탓할 수는 없는 문제여서 제가 비판하는 자세로 글을 쓰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설명을 좀더 해 보고 싶었을 따름이지요.. 하여튼 제가 표현이 좀 과했다면 그건 제 실수지요..
  • 키치너 2011/10/09 23:32 #

    제가 비판한 것은 최만리의 한글 창제 인지 여부가 아닌, 한글 창제를 누가 주도했냐는 점이었습니다. 이 외의 것에 대해서는 논쟁이 가능하겠지만 말이죠.

    찾아주셔서 견해를 밝혀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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