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 X : 현실, 시간, 그리고 변화

  


   아직 달력은 8월 중순이지만 2학기 강의가 시작한지도 벌써 4일째가 되었다. 수업받는 학생들도 강의하시는 교수님들도 바뀐 커리큘럼에 대해서 불만이 많지만 그나마 한가지 좋은 점이 있다면 도서관이 학기 중보다 한산하다는 것이다.
   최근 오랬동안 게릴라식으로 서울 하늘에 출몰했던 검은 구름이 걷히고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인 탓에 강의가 끝나는 대로 도서관으로 피신하는 생활덕에 평소 읽으려고 마음 먹었던 책을 몇권 접했다.

   "인턴 X"는 의사, 그리고 의대생이라면 한번 쯤 겪었거나, 겪게 될 1년 동안의 이야기다. 21세기가 된 지금도 이 분야는 전통적인 도제식의 엄격하고 강도높은 교육을 시행하지만, 아직 의사사회밖의 사람뿐 아니라, 의대생들조차 잘 알지 못하는 이야기들이다. 게다가 이렇게 교육받고 교육하는 당사자들도 적극적으로 자기들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 적이 없었으니, 어쩌랴. 아 통재라.
  사실 어떤 일이 얼마나 힘든 지 얼마나 괴로운 지는 직접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 힘들다. 이 책도 단순히 인턴 1년동안의 인격적 모욕, 절망, 육체적 그리고 정신적 과중한 부담으로 인한 고통만을 나열했다면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을거다. 하지만 저자는 지금까지 외부에 사정을 드러내기 꺼려했던 이쪽 세계 이야기-그 것도 군더더기 없이 변명하지 않고-를 낱낱이 기록하여 공개했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우리"에 대한 다른 이들의 공감과 이해를 바탕으로 새로운 인식을 열고자 했다고 한다.

 1965년 미국에서 닥터X 라는 익명으로 저술한 저자는 자신의 인턴 생활을 낱낱이 공개하여 파문을 일으켰다고 하며, 여전히 [그가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국에서만 모르는 듯하다. 물론 자신 이외의 모든 일에 대해서는 가명이나 이니셜로 서술하지 않고 실명을 공개했기 때문에 그를 찾아내려고 했으면 충분히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굳이 그의 실체를 밝히지 않은 것은 이 책이 가진 '진실에 대한 토로'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아마존가서 검색해보고 영문판의 카테고리가 어디인지 확인하고 실망이 컸다.).

  서문에서 왜 그가 이 책을 쓰게 되었는 지 밝힌 그는 "인턴생활의 실패는 첫 달에 달려있고 첫 달의 수련생활이 얼마나 고될지는 어느 과에 근무를 시작하느냐 하는 것과 어떤 레지던트를 만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한다. 내 경우엔 한편으로는 운이 좋았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불운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한다.
   그것은 그가 처음 근무를 시작한 과는 경험이 없는 풋내기 의사에게는 가장 힘든 내과였고, 유능하고 친절한 레지던트인 카레이 선생을 만나게 되었기때문인데, 인턴은 막 의과대학(또는 의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온 의사사회에서는 이등병과 같은 신세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방대한 영역을 자랑하는 내과에서 인턴 생활을 시작하는 것은 수 없는 시행착오와 실수, 그리고 좌절을 겪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 레지던트는 단순히 병원의 선임의사가 아니라 인턴과 함께 병원의 한축을 담당할 뿐 더러, 인턴에 대한 철저한 감독과 교육의 직접적인 당사자이기 때문에 인턴 생활에 있어서 "유능"하고 "친절"한 레지던트는 조금 살을 보태면 인턴이 얼마나 좋은 의사로 성장할 수 있을 지에 대한 책임자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런 사정 때문에 병원에서 인턴의 삶은 꽤나 각박한 것이다.

  "‥‥‥  한마디로 인턴은 어느 때 어느 곳에라도 있어야 하고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 밤낮없이 제일 먼저 불려 나가 고역을 치러야 하고 특히 주말 당직에 걸리면 병원 안에서 단 한 발짝도 나갈 수가 없었다. 의사라면 누구나 잘 아는 일이지만 밤이나 주말이면 어렵고 위급한 환자가 묘하게도 많이 나타나 죄 없는 인턴들이 가장 무거운 책임을 져야만 했다. 인턴만큼 힘이 들고 많은 시간 노동을 하며 많은 책임을 짊어진 직업이 또 있을까? 언제나 발동이 걸려 있어야 하지만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제때에 잠도 못 자면서 권위의 가면을 쓰고 뛰어야 했다. 머리가 아니라 피부와 발로 지식을 흡수해야 하고 인간에 대한 질병의 변덕과 잔인성, 경이로운 권모술수 등의 고통스런 교훈을 통해 직업의 앞날을 설계하고 거기에 자기 삶의 꿈을 가꿔야 하는 참혹한 아이러니.‥‥‥ "

   이런 생활을 보낸 뒤에 많은 의사들은 변해 간다고 그는 쓰고 있다. 살이 찌고 게을러지고 부유해지고, 이상을 낮추거나 타협을 하거나 자신의 부도덕성을 합리화시키려 애를 쓰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는 "인턴시절의 교훈은 그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며 결코 퇴색하지 않는, 살아 있는 긍지로서 일생 동안 그를 지배하게 된다."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병원에서 인턴으로 첫날을 보내면서 어떤 처방을 얼마만큼의 용량으로 내려야 할지도 확신을 가지지 못했던 그가 점차 경험이 쌓이고 숙련된 의사로 거듭나는 것은 다른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는 진부한 진행이다. 그러나 의사라는 직업상 경험과 숙련을 쌓으면서 범하는 시행착오와 실수는 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온다는 점에서 인턴들의 "성장"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처럼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볼 수 없다. 도공들이 도제들의 잘못 만들어진 도자기를 가차없이 깨버리는 것처럼 교육시키는 것은 분명 이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이다. 이런 의사라는 존재의 모순은 그를 담당하는 레지던트인 카레이 선생의 말에서 자조적인 모습으로 들려온다.
  
   "모름지기 의사는 환자가 많은 걸 기뻐해야 되지 않겠소? 따지고 보면 의사라는 직업은 퍽 아이러니하지. 남의 불행에 기대 먹고 사니까 말이요. 그런 의미에서 히포크라테스 선생이야말로 악당중의 악당이라고나 할까?"

by 키치너 | 2007/08/18 09:15 |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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