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반게리온 : 나와 타인과의 관계 애니메이션

    - 아나, 글 왜 날라감 -_-;; 임시저장된 글 없었으면 포스팅 완전 새로 할 뻔 (...)

     에반게리온 -서-를 극장에서 보기전에 가벼운 마음으로 보려고 했던 에반게리온 TV판, 엔드 오브 에바를 방금 모두 보았다.   [아. 바로 이게 그 에바였군] 
    예상한 만큼 머리속이 얼얼하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정신 한 구석을 울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작품 전부를 동의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처음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머릿속을 맴돌았던 생각에 대해 어느정도 답을 낼 수 있었는 데, 그 중 일부를 끄적여 본다.
  

    사람은 결코 타인을 자기 자신만큼 동등하게 알 수는 없다. 자신의 눈으로 본, 자신의 감각으로 느낀, 그리고 자신 속에 만들어낸 타인의 이미지는 결국은 모조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모조를 진실로 착각하고 상처입고 또 분노한다. 이것은 사람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기에 그 어떤 이도 이를 피해갈 수는 없다.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과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은 동일한 가치로 취급되지 못한다. 제 아무리 뛰어난 상담사나 심리치료사도 타인의 아픔을 온전히 받아내지 못한다. 애초에 [나]의 정신이라는 것은 외부에서 [자신]에게 들어오는 것에 대한 반응만을 직접적으로 느껴낼 수 있는 것이다. 비슷한 경험으로 인해 타인에 대한 공감을 하는 것은 결국 정신. [혼]에 기억된 것의 리바이벌인 것으로 타인의 그것은 될 수 없는 것이다. 고통이 이렇게 결국 한 개인만의 것으로 한정되는 가운데, 반면 기쁨은 온전히 개인적인 것뿐 아니라 타인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작품속에서 그렇게나 갈구되던 "어머니"의, "아버지"의,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인정은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자신의 기쁨은 타인이 필요하지만, 정작 타인의 아픔은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는 [이기적인] 인간의 속성은 우리들의 한계이자 고통의 원인이 된다.
   

    과거에도 이러한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는 인간 각 개인에게 커다란 아픔을 주었지만, 지금 이 시대에 와서는 그 고통의 강도, 고통의 양, 고통의 전파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기 때문에 우리들은 언제든지 황폐한 정신의 세계로 떨어질 위기를 안고 살아간다.  문명의 발달은 과거보다 더 많은 인간에게 감각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만끽할 수 있게해주었지만, 그 대가로 인간은 많은 [안식처]를 상실했고, 또 풍요를 가져온 문명 그 자체가 오히려 정신적으로 고통을 주는 장치로 기능해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의 모습은 항상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있다. 누군가가 뱉은 사소한 말은 그(녀)의 주변에서 당사자는 생각지도 못한 파장을 일으켜 희망 혹은 좌절, 기쁨 혹은 슬픔, 기대 혹은 분노를 가져올 수 있다.
    [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는 데.]
    인간이 자신이외의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모두 알 수 없는 한 저 말은 변명이 될 수밖에 없다. 자신으로 인해 '변화'된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을 위한 변명.


     살아가는 한, 이 문제는 떨어뜨릴 수 없는 천형일 수밖에 없다. 신에게 거역하여 더 이상 신의 장난감이 아니게 된 인간이 가지게 된 원죄로 말이다. 
    

     많은 인간들이 이러한 [원죄]로 고통받고, 이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어했다. 인간의 삶을 기록한 역사는 그러한 인간의 시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누군가는 자신의 고통을 누르고, 기쁨을 누리기 위해 타인에게 고통을 강요했다. 고대에서 전근대,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권력자들은 거침없이 그 일을 해왔다. 또 누군가는 타인과의 관계에 집착하여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고자 했으나 상대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신뢰]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해 절망으로 빠지기도 했으며, 반대로 자신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환희를 만끽했으나, 상대방에게 상처를 그리고 고통을 그리고 좌절을 안겨주기도 했다.

    [결국 인간은 이렇게 원죄를 안고 끝없이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현시대에 더욱 뚜렷히 그리고 강하게 나타났다. 그 의문에 대한 답으로 지금의 문명 사회는 많은 것들을 준비했고, 이 작품을 포함하는 [시각적 허구의 세계]도 그중 하나이다.
    에반겔리온은 사람과 사람이라는 문제를 정면으로 다룸으로써 작품의 진행과정에서 [우리]들의 공감을 얻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결론으로 제시한 것 중 하나는 너무나도 진부하다고 간주되었고, 또 다른 하나는 말 그대로 [허구]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누가 말할수 있을까. 이런 시도가 값어치가 없다고.
      분명 진부하다고 생각되었고, 또 실현될 수 없는 허구의 답을 낸 과정이었지만, 많은 이들은 그 과정을 통해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통한 아픔에 대해서 이전엔 느끼지 못한 정도로 새로 인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전보다는 자신과 타인의 고통에 대해 더 확실한 입장을 가지고 생각하고 느끼며 말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당장은 눈 앞의 환희와 기쁨에 정신을 뺏기고 있을 지라도 시간이 지난 뒤엔 자신에 상처준 타인의 마음에 대해, 그리고 자신 마음속의 아픔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걸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