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차세계대전으로 가는 길 - 비스마르크 체제와 삼제 동맹

  메테르니히 체제가 성립된 이래 이후 역사가로부터 장기 19세기라고 불릴정도로 안정을 구가하던 유럽 정치 체계가 서서히 파국을 향해 달려가 결국 세계대전이라는 "대지진"을 겪게 된것은 프로이센에 의한 독일 통일에서 그 진원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프로이센(주1)은 이미 메테르니히 체제이후 유럽의 열강 중 하나였으며,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자면 베스트팔렌 조약에서부터 유럽 정치사에서의 확고한 위치를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 통일은 프로이센에게 유럽 체제내에서 어느정도 위치를 인정받는 국가가 아니라, 세계적 패권국의 자리를 겨냥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곧 장기 19세기의 파국을 불러왔다. 이는 곧 기존의 세계적 패권국이었던 독일이 영국, 프랑스와의 경쟁에 뛰어드는 것으로 발전하였고, 독일 자신에서도 영국, 프랑스 주도의 현상유지를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게 하는 자기 최면적 암시에 빠져드는 단초가 되었다. 물론 모든 것이 처음부터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 독일 통일에 의한 유럽 체젱내에서의 역학 변화는 'concert of europe'에 균열을 가져왔지만, 장기간 유지된 유럽내에서의 평화는 이런 파열음을 막아내려는 관성으로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러시아가 프랑스와의 전쟁에 돌입하기전까지는 아무도 기존 체제가 붕괴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보불전쟁 이후 모든것은 바뀌었다. 복수심에 불타는 프랑스, 유럽내 분쟁 관여보다는 이미 건설한 세계 제국의 운영에 관심이 쏠려있던 영국, 프랑스를 넘어 유럽대륙의 패권국이 되고자 했던 독일, 나폴레옹 전쟁이후 열강의 위치에 오르고 그 지위를 유지하고 싶었던 러시아, 열강들의 자리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고 싶어 했던 이탈리아, 이렇게 서로 다른 의도와 목표를 가진 유럽국가들은 이후 이합집산을 거듭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갈등이 자라났다. 파국은 피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한 국가, 한 개인이 막기엔 너무나도 복잡한 관계로 서로를 옭아매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부터 19세기 유럽 정치사를 따라가면서 이 과정을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 보불전쟁 이후의 유럽 세력도, 30년후 이 지도는 누더기가 된다.


  독일 통일 이후 일련의 과정은 외교정책의 섬세함, 해결과정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었다. 직관과 경험이 정책의 성공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대부분의 외교 정책은 국가의 안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간주되기 떄문에 최고 정책 결정자의 의사는 논쟁없이 그대로 반영되는 경우가 많다. 독일 통일은 전후하여 독일의 권력은 왕인 빌헬름 1세가 가지고 있다기 보다는, 재상이었던 비스마르크에게 위임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유럽내 역학에 대해 뚜렷한 철학이나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를 전적으로 신뢰한 것은 아니었으나, 비스마르크는 사실상의 "협박"과 실적을 바탕으로 빌헬름 1세에게서 권력의 위임을 받아 낼 수 있었다. 이렇게 사실상 독일의 외교 정책을 결정하게 된 비스마르크는 본질적으로 보수주의자로서 유럽 협조 체제라는 판 자체를 깨뜨릴 생각은 없었다. 그로서는 독일의 우위만 인정된다면, 더 이상의 갈등은 불필요 할 뿐 아니라, 오히려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비스마르크 정책의 기본 방향은 프랑스를 짓밟고 러시아를 떠 받치는 것으로 구현되었다. 독일에게 패배한 프랑스의 감정을 잘 알고 있었던 비스마르크는 중부 유럽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독일의 지정학적 약점을 잘 알고 있었고, 프랑스가 러시아와 손을 잡게 된다면 애써 이룩한 독일의 우위에 기반한 유럽 체제는 파괴될 것이 자명하다고 보았다. 독일에게 프랑스 또는 러시아와의 단독 분쟁은 충분히 수행가능한 것이나, 양면 전쟁은 결코 있어서는 안되는 것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와 러시아의 관계를 떨어뜨리고, 러시아와 우호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삼제 동맹은 비스마르크의 고심이 담긴 독일황제의 혈연적 지위와 공화주의에 대한 러시아의 거부감, 오스트리아-러시아의 경쟁 관계를 이용한 절묘한 외교적 산물이었다. 삼제 동맹의 형성은 프랑스의 고립을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통일 이후 독일 주도의 유럽의 평화를 지향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었다. 삼제 동맹의 중심에 독일을 놓음으로써 이후 유럽내의 정치 외교적 상황은 베를린에 의해 조정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비스마르크는 실제로 그가 권력의 중심에 있음으로써 이를 성공리에 수행했고, 의도대로 유럽내의 분쟁을 방지했다. (쇤부른에서의 삼제동맹-三帝同盟(주2), Tri kaiser alliance) 

- 문제는 오로지 피와 철로서 해결된다고 연설하여, 오늘날 군국주의자의 대표적인 인물로 뽑히는 비스마르크, 하지만 그도 본질적으로는 현상유지를 꾀했던 평화애호가(!)였다.

  한편, 1873년 프랑스는 프러시아에게 배상금 전액(50억 프랑) 지불을 끝냈다. 이는 비스마르크의 예상보다 훨씬 이른 시기였는 데, 이는 배상금 문제를 프랑스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자 했던 그의 의도를 빗나가게 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또, 제국 통일 이후 비스마르크는 교황을 방패로 삼은 가톨릭 중앙당과 가톨릭에 대해 강경억압정책을 폈는 데, 이것이 바로 문화투쟁(Kulturkampf)이다. 약 8년에 걸친 가톨릭과 독일국가-사실상 프로이센-사이의 투쟁은 비스마르크가 반 가톨릭적 정책을 철회하는 것으로 끝이 났는 데, 결과적으로 이는 가톨릭 중앙당의 온건화를 유도했다. 이후 가톨릭 중앙당은 1차세계대전 발발까지 다시는 제국 정부에 공공연한 반대의사를 표명하지 못했는 데, 이로써 독일내 정치 구도를 안정화시키고 강력한 중앙 집권적 체제를 굳히려는 비스마르크의 의도는 사실상 달성되었다.

 
- 비스마르크 체제를 허물고자 했던 프랑스의 외상 델카세

그러나 문화투쟁은 독일밖에 새로운 문제를 가져왔다. 과거로부터 "로마 가톨릭의 맏딸"로 자부하던 프랑스와의 긴장 관계를 고조시킨 것이다. 독일과의 분쟁을 야기할 효과적인 명분을 찾고 있었던 프랑스 외무장관 델카세는 프랑스-프러시아 관계를 시험해 보고자 하였다. 프로이센 내부에서도 프랑스가 너무 빠르게 힘을 되찾는 것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고, 비스마르크는 예방전쟁까지 고려하고 있음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델카세가 의도한 것이었고, 그는 독일이 유럽 평화 체제를 파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유럽 각국에 호소하였으며, 영국 타임즈에도 그의 주장을 기고하여 독일의 침략적 의도를 규탄하였다. 이에 대해 영국에서는 프랑스에 동정적인 여론이 형성되었으며, 러시아 역시 프랑스가 더 이상 약화되는 것을 방관할 수 없다며, 베를린에 특사를 파견하여 보-불 관계를 중재하려 하였다. 특히 러시아 외상 고르챠코프(일전의 알벤스레벤 조약의 당사자)는 전쟁 발발시 러시아는 좌시하지 않겠다고 비스마르크에게 경고를 하였다. 이것이 바로 1875년 전쟁 소동이었는 데, 이 때 비스마르크는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프랑스에 대한 침공의사가 전혀 없음을 천명해야 했다. 이 일로 러시아의 고르챠코프는 기고만장하였으며, 자신이 유럽의 평화를 지켜냈다고 생각했다. 이 소동으로 인해, 비스마르크는 유럽각국이 프랑스의 약체화를 결코 바라지 않으며 오히려 독일의 팽창주의적 의도를 매우 경계한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애초의 정책에 대한 변화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계기로 비스마르크의 외교 정책은 더욱 정교하고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수 많은 비밀협정과 협상으로 이뤄진 비스마르크의 외교는 마치 거미줄처럼 얽히게 되었고, 이는 비스마르크가 권력을 잡고 있었을 때는 그럭저럭 유지될 수 있었으나, 그의 후계자들은 그의 거미줄을 모두 파악할 수 없었고, 파악하였다고 하더라도 수행할만한 능력을 결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 우위에 의한 유럽 평화는 서서히 붕괴하고 있었다. 또, 비스마르크가 권력을 잡고 있었을 때부터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 근동 문제는 비스마르크 자신이 "한낱 새 뼈다귀만도 못한 것"이라고 일컫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외교 정책의 핵심인 러시아와 오스크리아의 협력을 방해했을 뿐 아니라, 갈등을 야기하여 결국 비스마르크 실각이후 비스마르크 체제의 붕괴를 가져온 초석이 되었다. 즉, 문제는 동방의 병객, 오스만 제국에서 오고 있었던 것이다.

주1. 프로이센의 독일 통일 이후, 프로이센의 왕은 독일 황제를 겸하게 되었으며, 프로이센의 재상은 독일 제국의 재상이 되는 등, 프로이센이 곧 독일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엄격히 따지자면, 프로이센은 독일 제국을 구성하는 하나의 왕국이지만, 본 포스팅에서는 독일과 프로이센을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는 것으로 한다.

주2. 트라이 카이저 동맹은 1873~1886까지 지속되었다. 동맹의 목적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발칸 반도에서 각자의 영향권 안에 있는 지역에 대해 서로 합의하게 함으로써 독일과 이웃한 이 두 나라 사이의 적대감을 완화하고, 독일의 숙적인 프랑스를 고립시키자는 것이었다. 동맹국 가운데 어느 한 나라가 제3의 강대국과 전쟁을 치르는 경우, 나머지 두 나라는 우호적 중립을 유지하기로 되어 있었다.

참고문헌
1. The struggle for mastery in Europe/ Taylor, A.J.P. /  Clarendon Press / 1971
2. A Diplomatic History of Europe Since the Congress of Vienna , 유럽 외교사 / Rene Albrecht-Carrie , 김영식, 이봉철 역 / 도서출판 까치 /  1985

by 키치너 | 2008/01/31 15:02 | - 일차 세계대전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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