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도화선 - 히틀러의 일차 대전의 경험 (2)

(이 글은 Feature Articles: A Slow Fuse - Hitler's World War One Experience을 번역한 글입니다)
특집 기사 : 느린 도화선 - 히틀러의 일차 대전의 경험 (1)
특집 기사 : 느린 도화선 - 히틀러의 일차 대전의 경험 (3)

  이 젊은이는 감정의 격발과 흥분속에서 그것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시립 도서관에서 정치적인 팸플릿들을 읽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또는 그의 왜곡된 세계관에 맞는 그 어떤 문헌이라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는 또 최근의 소식들을 그의 부랑자 친구와 토의했고 논쟁했다. Reinhold Hansich는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그는 부랑자 수용소를 배회하며, 거기서 받은 빵과 수프로 지냈고, 그리고 정치관에 대해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의 시각에 동의 하지 않는 어떤 사람이라도 그들 자신이 음모와 유태인의 계략에 대한 분노에 가득찬 폭언의 대상이 되었다는 걸 쉽게 알수 있었다.

  1913년에 이르러 이 실패한 예술가는 근대화를 추진하고, 권력을 이전하려는 그의 조국의 노력에 의해 점차 구역질이 났다. 히틀러는 이미 약해진 국가를 유지하려는 시도를 하기보다는 정부가 손실한 영토는 분리해버리고 게르만 민족의 오스트리아를 고유한 독일로서 합병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나의 투쟁"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나의 내면속의 합스부르크 왕국에 대한 혐오는 날이 갈수록 커졌다. (중략) 이것은 잡다하게 끌어모은 체크인, 폴란드인, 헝가리인, 루테니아인,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그리고 인간사회를 좀먹는 세균들인 유태인으로 이루어진 잡탕일 뿐이다." 
 
  히틀러가 공언한대로 이것이 바로 그를 뮌헨으로 가게한 원동력이었다. 
 "나는 저 도시를 내가 아는 어떤 곳보다 사랑하게 되었다. 독일인만의 도시! 얼마나 빈과는 다른 모습인가."  

   그러나 히틀러는 중요하지만 그에게는 불편한 사실을 감추고 있다. - 그는 뮌헨에 징병기피자로서 온것이다. 그는 관계당국에 이미 1910년에 출두하도록 되어있었다. 1913년, 오스트리아 경찰은 적극적으로 그를 추적하고 있었다. 한번은 뮌헨에서, 그는 감찰국에 자발적으로 출두하거나 체포되어 국외 추방될 선택을 해야했다.
 
   오스트리아 제국을 위해 싸우는 것은 히틀러에게 끔찍한 것이었지만, 그러나 그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 1914년 2월 5일에 그는 건강악화로 인해 군입대를 거부당했던 것이다. 1913년에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점령한 뒤로 게슈타포는 이 사실에 관계된 모든 서류를 찾아서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히틀러는 그것들이 분실되었다는 말을 듣고 격분했다.

  이런 행운덕분에 그는 뮌헨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는 이제 하숙집을 구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는 광고일을 하면서 얼마 안되는 돈을 벌었을 것이다. 그는 여전히 카페나 펍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정치를 논쟁하면서 보냈다. 그리고 항상 그는 자신의 관점에만 맞는 읽을 거리들을 가지고 왔다. 그러나 1914년 여름이 되자 아돌프 히틀러는 실의와 낙담에 빠졌다.

6월 28일 프란츠 페르디난드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저격당한 것이다. 히틀러는 합스부르크왕가와 그 늙어빠진 제국을 위해 싸우는 것이 극도로 싫었다. 이것이 그에게 독일에 있어야 하는 특별한 이유가 되었다. 히틀러는 바이에른당국에 입대를 허가해 줄것을 요청했다. 그는 가쁜 숨을 쉬며 답장을 읽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 통지서를 열어보았다. 내가 아는한 어떤 단어도 내가 느낀 만족감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히틀러는 바이에른 주둔 제 16 보병 연대의 제 1 중대에 입대했다. 그 연대는 비공식적으로 최초의 지휘관인 폰 리스트 대령의 이름을 따서 '리스트'연대라고 불려졌다. 흥미롭게도 루돌프 헤스-주:이후의 나치 부총통-는 같은 연대에 자원입대했다. 훈련과 교련을 받는 몇달동안 그는 건강을 회복했다.  10월 8일 그는 바이에른 왕 루드비히 3세에 대한 충성 서약을 헀다. 많은 신병들이 군의 관례로서 구 서약식을 보았지만, 국가주의적인 히틀러에게 그것은 거의 종교적인 의미가 있었다. 실제로, 그 서약식은 그와 그가 사랑하는 독일간의 성스러운 계약을 상징했다. 그의 믿음의 강렬함은 히틀러가 1918년 11월 11일에 느낀 배신감이 얼마나 컸는 지를 설명해준다. 그는 그가 의무를 이행하는 동안, (배신자들에게 강요당한) 국가가 약속을 저버렸다고 믿었다.

  1914년 10월 21일, 리스트 연대는 서부 전선으로 가는 기차에 탔다. 2일 동안의 여정후 릴에 도착하자, 그들은 곧바로 루프레히트 대공이 지휘하는 6군의 바이에른 제 6 사단에 배치되었다. 독일군은 1차 이프르 전투의 고투를 겪고 있었다.

-계속

by 키치너 | 2008/04/03 20:20 | - 일차 세계대전 | 트랙백 | 핑백(4)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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