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도화선 - 히틀러의 일차 대전의 경험 (3) - 일차 세계대전

  특집 기사 : 느린 도화선 - 히틀러의 일차 대전의 경험 (1)
  특집 기사 : 느린 도화선 - 히틀러의 일차 대전의 경험 (2) 

   불안정한 기상상황때문에 초기의 전장은 후일 참호전으로 전선을 교착상태에 빠지게 한 "대공세"때보다는 치명적인 상황을 연출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장의 현실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 근대 화기들의 살상력을 고려하지 않은 채 19세기 전술로 병사들을 진격시킨 것은 끔찍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살인적인 기관총의 위력과 정확해진 소총 사격에 의해 돌격하던 병사들은 풀이 베어지듯 쓰러져갔다. 바이에른 군이 도착한것은 너무나 유명하고 그래서 거의 믿을 수 없는 상황이 연출된 , 이프르에서의 "대학살"(Kindermord zu Ypren)의 직후였다. 히틀러가 속한 연대는 곧 비슷한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었다.

1914년의 독일군

  10월 29일, 리스트연대의 3개 대대는 격렬한 전장으로 던져졌다. 영국의 제 1 콜드스트림 근위연대의 두 중대와 제 1 블랙 왓치 연대의 한 중대는 Gheluvelt 근처의 목표지로 가는 독일군을 차단했는 데, 사실상 화력 지원 없이*1) 독일군을 격퇴하고 심각한 피해를 입힌 것은 영국군이 얼마나 우수한 지 잘 보여주고 있었다.

*1)(영국군은 포병대의 포격을 각 포 당 9회로 제한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그와 비슷한 많은 이들이 비겁하게 도망가고 병역 기피자가 된것과는 달리, 실제로 매우 훌륭한 병사였다. 그는 포화가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그의 상관에 대한 경의를 보였고 결코 그의 명령을 의심하지 않았다. 사상자가 늘고 사기가 저하되는 가운데서도 히틀러는 아낌없이 그의 의무를 수행했다. 그는 그에 대한 포상으로 병장으로 승진되었다.

  끊임없는 전투때문에 리스트 연대는 이프르 남부의 공격임무를 수없이 맡아야 했다. 프랑스와 대치하고 있는 이 때, 독일군은 또 다른 망치질을 받아냈다. 히틀러는 Wytschaete, Croonaert 숲 부근에서의 전투로 인해 이등 철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강렬한 포화가 쏟아지던 그 전투동안, 히틀러는 전령병(Meldeganger)으로 지명되어 개활지에 심각하게 부상당한 전령사관을 남기고 비틀거리며 떠났다.  친구와 함께, 그는 그 부상당한 남자를 안전한 곳으로 끌어내려고 애를 썼고, 1914년 12월 그에 대한 상을 받았다. 

  1차 이프르 전투 결과 히틀러가 속한 연대의 대다수는 전사했다. 히틀러는 뮌헨의 하숙집 주인에게 3500명에 달하는 병사중 단지 600명만이 남아있다고 편지를 썼다. 연대 지휘관 리스트 대령 역시 전사자 중 한명이었다. 'Over by Christmas(크리스마스내로 끝내버리자)' 라는 경구는 오늘날 어처구니없을만큼 순진해보이지만, 이 말은 실제로 1914년의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전쟁에 자원하도록 했다.
  -이른바 전쟁은 한번쯤 해볼만한 축제와 같은 분위기로 시작한 것이었다!-

  전쟁이 기대한 것보다 길어지는 것이 현실화되자 참전한 이들의 사기는 심각하게 저하되기 시작했다. 참전한 병사들은 이제 의지력의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그의 많은 동료와 달리 이것을 이미 일찍부터 느끼고 있었다.
1914~1915년의 이프르 전투

  그러나 1914년의 공포는 아직 오지않은 지옥을 맛 본것에 불과했다. 1915년은 수많은 진보가 일어난 한 해였다 - 그 진보는 살인기술과 그리고 그외의 매우 적은 것들로 이뤄진 것이지만 말이다. 히틀러가 속한 연대는 뇌브 샤펠(Neuve Chapelle)의 전투에서 영국군의 맹공을 받았다. 참호전 전술에서 여전히 교훈을 얻지 못한 독일군과 영국군 양쪽은 공격과 반격이 반복되는 죽음의 경기를 치루게 되었다.

  뇌브 샤펠 전투 약 한달뒤 주도권을 다시 찾아오기 위해, 독일군은 이프르(Ypres)에서 다른 공격을 시작했다. 2차 이프르 전투는 전쟁에 최악의 장면을 가져왔다. 이것은 근대 국가가 그들의 적을 죽이기 위해 독가스를 사용한 첫 경우였던 것이다. 뇌브 샤펠의 전투에서 고전하던 리스트 연대는 이제야 최초로 보조적 역할을 맡게 되었다.

   히틀러가 치료도 받지않고 살아남은 많은 이야기는 불가사의한 무언가가 그를 가호하고 있다는 믿음을 불러왔다. 그는 평범한 병사처럼 행동하는 것을 거부했고, 전장에서 그는 결코 떠나기를 원치 않았으며 주둔지의 여성들에 관한 음담패설에 끼어드는 것도 꺼려했다. 그에게 가장 기쁜 시간은 참호의 광경을 그리거나 잼이 가득 발린 빵을 먹는 데 보내는 때였다. 한때 그는 폭스라고 이름 붙인 개 한마리를 보살폈는 데(히틀러는 개들을 대단히 좋아했다), 그 개를 잃어버렸을 때 그는 거의 미칠것같이 보였다.
- 이는 히틀러의 인간 불신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

  때때로, 그는 점잔을 빼며 흡연과 음주의 해악에 대해서 말했다 - 그것은 일반적 병사들이 좋아하는 주제가 아니었다. 가끔 그는 많은 이들을 미칠정도로 만들었는 데, 특히 그것은 그의 정치적인 '강의'가 있을 때였다. 방공호에 틀어박혀 연합군 포격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가 떠뜰어대는 맑스주의자들의 음모와 유태인들의 계략에 대한 고함이 뒤섞인 설교를 듣는 것은 어떤 사람이라도 절망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병영생활에서 히틀러는 직업적인 완성표본과도 같았고, 이것은 그의 동료들이 그에게 대단한 존경심을 가지게 했다. 엄청난 집중 포격의 한가운데에 뛰어가 현재 상황을 알리고 사령부의 통지를 가지고 돌아오는 것은 실로 이런 강철로 만들어진 듯한 신경덕분이었다.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상황에서의 히틀러의 생환은 그의 동료들의 눈에 그에게 무언가 신비로움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모든 지도자들이 고민하는) 삶과 운명에 대해 갖는 의문에 대해서 두가지 관점이 있다. 그 중 많은 이들은 그것을 운이라고 믿는다. 혼란과 무작위의 요소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을 결정짓는다는 것이다. 반면에 다른이들은 거의 모든 사건의 주요한 과정중에 신의 섭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성격에 따라, 히틀러는 (심지어는 베테랑 동료의 눈에도 강박적으로 보였다) 그가 신성한 힘에 의해 준비되어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갔다. 훗날, 총통으로서 그는 그런 배경이 있는 그의 믿음의 예를 수없이 강조했었다. 첫 사례에서 히틀러는 아주 신비로운 목소리가 포격이 계속되는 가운데 그를 혼잡한 방공호에서 불러내었다고 회상했다. 참호속에서 나온지 몇분만에 들어온 유탄이 엄폐호를 뭉개버렸고 그 안에 피신했던 모두가 죽었다는 것이다.


  더욱 이상한 두번째 일은 개전 무렵 아니면 종전 부근에 발생했다(기록이 일치하지 않음). 고위 훈장을 받은 헨리 텐디라는 영국군 병사는 히틀러의 조준 사격을 받고도 그의 진영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방아쇠를 당기는 대신에, 그 영국인은 그를 보내려 했다. 텐디가 그의 소총을 내리는 것을 본 히틀러는 전쟁의 신이 그의 편에 서서 도와주고 있다고 느꼈고, 총통이 된 후 그의 '수호신'의 그림을 베르히테스가든 별장의 벽에 걸도록 했다. 

 (이 글은 Feature Articles: A Slow Fuse - Hitler's World War One Experience을 번역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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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08/05/27 18:49 # 삭제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키치너 2008/06/26 03:50 #

    ㅇ님/ 댓글을 이제야 달아서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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