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4월 23일
영국-프랑스 화친협정 (Entente Cordiale)
"조약은 조약문 그 자체보다, 조약문 아래에서 흐르는 정신에 의해서 사실상 좌우된다"
시기가 그렇게 멀지 않은 삼제동맹은 왜 파열되었고, 수세기동안 앙숙과도 같았던 프랑스와 영국은 어떻게 역사적인 화친과 이후, 사실상의 동맹관계를 맺을 수 있냐는 물음은 저 경구처럼 그 조약 자체보다는 그 아래에 어떤 정신이 흐르고 있는 지 파악해야하는 것이 우선일겁니다.
프랑스는 대륙에서 우호적인 관계였던 러시아가 일본에게 대패하자, 독일에 대한 복수를 위한 새로운 파트너가 필요했고 영국은 더 이상 유일한 슈퍼 파워(초강대국)가 아니었기에 독일의 무지막지한 건함 계획을 바라보며 프랑스를 이용해 독일을 제어하려는 의도를 갖게 되었으며 이 두 국가의 이해는 여기에서 일치했습니다.
"독일에 맞서 우리끼리 적대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물론 영국이야, 근세이후부터 유럽대륙에서 패권국이 나타나지 않도록 매우 신중하고도 정교하게 간섭정책을 펴온 것이 전통이었고, 이 조약자체는 단지 이후 계단을 오르듯이 진전된 프랑스와의 우호의 증진을 당기는 방아쇠역할로 한정할 수 있지만, 프랑스처럼 역사적으로 영국의 숙적이자 영국에 맞먹을 수 있는 강대국과 힘을 합하는 것은 영국사상 처음있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두 국가의 화친은 결국 1차 세계대전의 양국가의 피로 물들어진 승리와 잃어버린 세대라는 결과를 가져왔고, 그 결과 "세계는 바뀌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은 전장보다는 전장 뒤쪽의 모습이 더욱 참혹했던 2차 세계대전을, 그리고 19세기 후반엔 전혀 예상하지 못한 20세기를 그려내는 데 일조하게 되었던 것이죠.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1차 세계대전직전 영국과 프랑스가 사실상의 동맹관계를 맺지 못했다면, 2차 세계대전은 없었을 것이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영국-프랑스 화친협정 (Entente Cordiale) : 영국과 프랑스 간에 체결된 협정(1904. 4. 8).
이 협정에 의하여 영국과 프랑스는 양국간에 놓여 있는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적대관계를 청산했다. 또한 이 협정은 양국간에 외교적 협력의 분위기를 조성하여,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10년 동안 독일의 압력에 공동대응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이 협정은 결코 양국 사이에 동맹 관계가 형성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1894년 프랑스가 러시아에게 약속한 공약에 영국을 끌어들이지도 못했다. 이 화친협정은 1898년부터 프랑스의 외무장관직을 맡은 테오필 델카세가 실시한 정책의 결정판이었다. 그는 프랑스와 영국이 협약을 체결한다면 서유럽에서 독일이 어떤 동맹 체제를 형성하더라도 프랑스의 안전이 어느 정도 보장될 것으로 믿었다. 협상을 성사시킨 주역은 런던 주재 프랑스 대사 폴 캉봉과 영국의 외무장관 랜스다운 경이었지만 영국 왕 에드워드 7세의 친프랑스적 성향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 협정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이집트에서는 영국에게, 모로코에서는 프랑스에게 행동의 자유를 부여한 것이었다. 다만 프랑스의 경우에는 프랑스가 모로코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하건 그곳에서 스페인이 갖는 이권을 합리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조건이 첨가되었다. 동시에 영국은 프랑스령 기니 근해의 로스 제도를 프랑스에 할양하고 나이지리아의 국경을 프랑스에 유리하게 설정하며 감비아 계곡 상류에 대한 통제권을 프랑스에게 양보하기로 했다. 반면에 프랑스는 뉴펀들랜드 근해의 일정 어장에 대한 독점권을 포기했다. 뿐만 아니라 타이에서 프랑스와 영국의 세력권이 설정되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인접한 동부 지역은 프랑스의 세력권이 되고, 미얀마의 테나세림에 인접한 서부지역은 영국의 세력권이 되었다. 또한 누벨헤브리디즈 제도에서 영국인 개척자와 프랑스인 개척자들 사이의 경쟁을 완화하기 위한 대책도 마련되었다.
이 협정에 의해 양국은 사실상 고립상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즉 이 협정체결 이전에 양국은 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견해 차이로 인해 프랑스는 본의 아니게, 영국은 만족스럽게 고립 상태를 유지해왔었다. 다시 말하면 영국의 유일한 동맹국은 일본(1902)이었으나 일본은 유럽 지역에서 전쟁이 발생한다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프랑스 역시 러시아 이외의 동맹국은 없었으며, 러시아는 1904~05년 러일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그 능력은 신용을 잃은 것이었다. 한편 영국-프랑스 화친협정은 독일을 당혹시켰는데, 그것은 독일이 오랫동안 프랑스와 영국 간의 반목에 입각한 정책을 써왔기 때문이었다. 1905년 독일은 모로코에서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프랑스 화친협정을 무산시키려고 시도했지만, 이러한 독일의 시도는 오히려 이 협정을 강화시켰을 뿐이다. 이 사건은 보통 탕헤르 사건 또는 제1차 모로코 위기라고 불린다. 곧이어 프랑스군 참모들과 영국군 참모들 사이에 군사회담이 시작되었다. 프랑스와 영국의 유대는 1906년 알헤시라스 회담과 1911년 제2차 모로코 위기에서 재확인되었다.
# by | 2008/04/23 00:33 | - 일차 세계대전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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