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도화선 - 히틀러의 일차 대전의 경험 (4) - 일차 세계대전

느린 도화선 - 히틀러의 일차 대전의 경험 (1)
느린 도화선 - 히틀러의 일차 대전의 경험 (2) 
느린 도화선 - 히틀러의 일차 대전의 경험 (3)


  히틀러가 참가했던 모든 전투중에서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솜전투였다. 솜 전투는 영국역사에서 국왕과 국가에 대한 맹신이 총탄, 가시철사, 그리고 시체들의 한복판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린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솜 전투는 독일의 국가적 프시케(영혼)에도 큰 상처를 남겼다.

  그 전투의 가장 큰 신화중 하나는 카이저의 병사들이 벙커에 쭈그리고 앉아 연합군의 포격에 전혀 피해를 입지 않은 채 있었다는 것과 영국군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 지에 대한 것이다. 적군이 전멸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에, 영국군은 독일병사들이 살아있을 뿐 아니라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것을 알아채고 충격을 받았다. '방탄'벙커는 이런 충격에 대한 유일한 가능한 설명이었다.

  독일군이 훌륭하게 공격을 막아내고 있다는 것이 진실이었던 동시에, 영국군의 엄청난 포격이 그들의 진군로에 있는 그 어떤 것-대부분의 벙커를 포함해서-도 지도에서 지워버릴 수 있다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독일군은 지상 최대의 포격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얼마나 많은 참호가 그대로 무덤이 되어버렸는 지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포탄이 떨어지는 소리는 병사들에게 신에 대한 공포를 불러일으켰고 이는 떨어지는 포격에 의해 즉사할 것이라는 사실에 더욱 강화되었다; 많은 병사들이 공황에 빠져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사례는 병사들의 정신적인 강인함에 대한 의문을 불러왔다. 충분한 사람이 살아남고 정신이 온전하다면, 참호들은 유지될 수 있을 것이고 증원병력이 돌격하기 위해 보내질 수 있었다.  영국군은 이걸 알아채자 바로 전술로 사용했다. 독일 지휘부가 잿더미가 된 땅을 다시 차지하기 위해 멍청한 반격을 명령했을 떄 독일군의 사망률은 그야말로 하늘 높이 치솟았다. 이 병력들은 사실상 그들과 완전히 똑같은 방식을 취했던 영국군의 반격에 전멸했다 - 독일군과 영국군의 차이는 독일군의 희생은 말 그대로 값어치가 없었다는 것뿐이었다.

  1916년 10월 7일, 바포메(Bapaume)근처에 배치되는 동안 히틀러는 다리에 포탄파편에 의해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부상에서 회복하도록 베를린 근처의 비리츠(Beelitz)로 후송되었다. 건강이 회복되자 그는 제도(帝都) 베를린을 둘러보고자 했다. 히틀러가 방문한 그때 베를린은 심각한 식량 부족사태에 허덕이고 있었다. 기본적인 고기의 공급도 사치에 해당할 정도였던 것이다. 오랜 시간동안 심한 노동에 의한 피로와 텅빈 위장아래에서 버티는 것은 많은 군수품 공장 근로자들에게 너무나 가혹했고 그렇기에 파업은 피할 수 없었다. 배급의 부족으로 인한 노동자들의 파업은 군수물자의 부족을 야기했으며, 바로 이것이 독일의 패전에 감춰진 진실된 이유였다. 그러나 이 사건들의 목격자였던 히틀러는 그럼에도 대중들을 바보로, 국가의 반역자들로 간주했다.

  히틀러는 가벼운 의무에 적합하다고 판정되었기에 뮌헨에 위치한 리스트 연대의 보충역 대대 주둔지로 배치되었다. 그는 '집'에 온 것에 기뻐했지만 시민들의 패배적 태도에 크게 실망했다. 사기의 저하, 무기력한 행동, 동지애의 결핍은 그를 낙담시켰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썼다. "나는 같은 독일민족의 사람들사이에서의 이런 하찮은 논쟁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전선으로 보내줄 것을 자원했다. 1917년 2월, 그는 그의 부대로 돌아왔고 이것은 살아남은 동지에게 순전히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곧 산만한 정치적 발언을 쏟아내던 예전의 그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가 가장 좋아하는 주제가 내부의 적들이 꾸미는 공모에 대한 것이 되었다는 것은 전혀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다. 히틀러의 전우였던 한스 멘드(Hans Mend)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는 식사하는 동안 구석에 앉아서 손을 모은 자세로 깊은 명상에 빠져있었다. 갑자기 그는 벌떡 일어나더니 흥분한 것처럼 달리면서 우리의 결정적인 승리는 적군의 가장 큰 대포보다도 더 커다란 위험인 독일인의 보이지 않는 적들때문에 부정될 것이라고 떠들어댔다."

1917년의 이프르(Ypre) - 3차 이프르 전투


  히들러가 돌아온 것은 전력을 다한 영국군의 공격이 Arras에 가해지고 진흙투성이에서 대학살이 벌어졌던 Passechendaele을 둘러싼 3차 이프르 전투가 터진 바로 그 때였다. 다시 한번 히틀러는 그의 의무를 결단력과 용기를 가지고 완수했다. 그는 3급 철십자 훈장뿐아니라 수 많은 표창을 수여받았다. 히틀러처럼 훈장을 받은 베테랑은 승진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지만, 그는 그에게 영광과 존경을 보증한 그의 역할에 머무르는 것을 선호함으로써 뚜렷한 (전쟁에 대한) 열의를 보였다.

(이 글은 Feature Articles: A Slow Fuse - Hitler's World War One Experience을 번역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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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굽시니스트 2008/06/30 01:04 #

    하앍, 이거 원 언제나 감사히 잘 받아뵙고 있습니다 굽신굷신

    '대포격' ... 이 단어의 울림이 갖는 압도적인 무게감의 공포와 무여백의 황홀경은... 가히...
  • 키치너 2008/06/30 01:25 #

    어이쿠. 굽시니스트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니 저야말로 굽신굽신;;
    1차 세계대전은 사실상 포병의 마지막 전성시대이니, 포병오덕으로서는 하앍하앍 할만하죠. -물론, 2차 대전의 세바스토폴전투도 만만치 않긴 합니다만 ㅎㅎ
  • 산왕 2008/06/30 01:32 #

    영국사에서는 2차대전까지도 이야기하긴 합니다. 대충 엘리트(고대 로마시대의 엘리트처럼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들') 계층이 1차대전에서 1/3, 2차대전에서 1/3 말그대로 사라져 버렸다는 것으로, 어떻게 해볼 수 없을만치 인적 손실이 생겨버렸다고 이야기하더군요.(1차대전에서 1/3 쓸려나갔으니 [위험한 선동꾼 젊은이™]가 전시내각의 수상이 될 수 있었겠지만요. 하하;)
  • 키치너 2008/06/30 01:47 #

    영국은 솜전투 첫날에만 1만9240명의 장교와 병사가 전사해서, 1일 사상자 수로는 영국 전쟁사상 최다를 기록했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솜전투까지만 해도 특정 사단=특정 지역 출신병 이었던 터라, 한 사단이 괴멸적 타격을 입으면 그 지역 성인 남성이 싸그리 사라져버리는 사태가 발생하니 그야말로 영국국민에게는 엄청난 심리적 충격이었을 것 같습니다.
  • 키치너 2008/06/30 01:53 #

    사실 이런 걸 생각하면, 영프 양국에 그렇게 엄청난 손실을 강요한 독일이 양차 세계대전을 주도한 것도 놀라운 데, 전후에 반토막난 국가에서 다시 유럽 최강의 경제력을 자랑하게 된 것은 놀랍다 하지 않을 수 없다고나 할까요 :-b
  • 키치너 2008/07/04 19:35 #

    세계사광님의 덧글은 지웠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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