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도화선 - 히틀러의 일차 대전의 경험 (5) - 일차 세계대전

느린 도화선 - 히틀러의 일차 대전의 경험 (1)
느린 도화선 - 히틀러의 일차 대전의 경험 (2)
느린 도화선 - 히틀러의 일차 대전의 경험 (3)
느린 도화선 - 히틀러의 일차 대전의 경험 (4)

  서부 전선의 전황을 바꿔버린 가장 큰 사건 중 하나는 머나먼 동쪽에서 발생했다. 짜르의 몰락과 볼셰비키의 집권으로 야기된 혼란을 기회로, 독일은 그들의 요구를 러시아에 강요했다. 동부전선이 안정되자 독일은 병사, 물자, 병기들을 '대침공'을 위해 서부전선으로 옮길 수 있었다. 1918년 서부전선에서 연합군의 대공세를 막아내는 데 성공한 독일군은 새롭게 단결심으로 충만해졌다.

  "마지막 공격과 최초의 두번의 공격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내 삶에 그 경험은 엄청난 인상을 남겼다." 히틀러가 느꼈던 확신은 올바른 것이었을까? 그건 사실이었다. 독일의 준비상태는 훌륭했고, 사기도 매우 높았다. 심지어 독일군은 새로운 전술을 적용하고 있었다 - 그 전술의 요체는  수준 높은 작전행동이 가능한 작은 규모지만 고도로 무장된 돌격대에 있었다. 그러나 이런 모든것 뒤에는 잠복된 임박한 재앙이 도사리고 있었다 - 그것은 사실상 독일이 던졌던 마지막 주사위였고, 수뇌부의 대부분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1918년 교전중인 미군

  미군 병사, 총기, 공군기가 프랑스로 밀물 밀려오듯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미국의 산업력과 압도적인 인력 공급은 독일의 숨통을 죄어온 해양 봉쇄의 효과와 합쳐져 1919년의 봄 또는 1918년의 겨울에 이미 독일의 패배를 기정사실화했다. 결국 독일은 강력한 강타 한방에 연합국에게 쓰러져버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리스트 연대는 슈멩데담(Chemin Des Dames)를 재점령하라는 명령을 받고 전장으로 나갔다. 6월말 경 독일군은 마른에 이르렀고, 프랑스의 수도를 타격거리내에 두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부 몽상에 불과헀다. 독일군이 파리까지 진격했다고 해도, 그들은 파리를 점령해야 했고, 2차 세계 대전에서 본 것처럼 방대한 도심지역을 점령하는 것은 공격측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것이었다. 미군 병사들과 그 물자들이 도착하자, 연합군에게 거대한 반격을 전개하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연합군의 반격을 상쇄하기 위한 독일군의 공세는 장엄한 것이었지만, 결코 (전세를 바꿀만큼) 충분하지않았다.

  1918년 8월 4일 독일군이 한창 마지막 대공세를 펼치고 있을 무렵, 히틀러는 '총체적인 공훈와 개인적인 용맹'을 기리는 1등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는 혼자서 참호에 모여있던 프랑스군 한 무리를 손쉽게 포로로 잡았던 것이다. 교활하게도 히틀러는 프랑스군의 임시 방공호의 귀퉁이까지 기어가서 그들이 이미 포위되었고 항복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소리쳤다. 히틀러의 계책에 속아 그 프랑스군들은 저항하지도 않고 밖으로 나와 모두 포로가 되었다. 권력을 잡은 뒤, 나치의 선전원들은 명백히 히틀러가 잡은 포로의 숫자를 늘렸고 그 실수는 총통이 기뻐했기에 교정되지 않은 채로 남겨졌다.
히틀러의 철십자 훈장들

  1등 철십자 훈장은 히틀러에게 그가 간절히 열망해왔던 보상, 인정, 그리고 지위를 가져다 주었다. 이 포상은 사관들에게는 드문 것이었고 더구나 임관되지 않은 계급을 가진이에게는 더욱 더 희귀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의 용맹, 영예, 그리고 잠재 의식수준에서의 인종적 우월성에 대한 공식적인 인정이었다.  다른 나치 지도자들은, 특히 유별났던 괴링은, 스스로에게 훈장과 술이 달리고 빛나는 견장을 달았지만, 히틀러는 단지 그의 철십자 훈장을 찼을 뿐이다. - 그것은 바로 그에게 영예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이 글은 Feature Articles: A Slow Fuse - Hitler's World War One Experience을 번역한 글입니다)

거의 끝나갑니다. 다음 편이 마지막이 될 듯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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