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의 불온 서적만 있을까? 법무부의 '금서목록'도 있다. 잡동사니

  이번 군의 '불온 서적' 목록에 대해 떠들석한 것에 대해 조금은 놀라고 있다. '불온 서적' 지정 자체가 놀라운 게 아니라, 군의 '불온 서적' 지정에 대해 갑자기 호들갑을 떠는 분위기 자체에 대해서 말이다. 아니, 그럼 이번 '불온 서적'지정이 정당하고 당연하거냐고?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단지 나는 군의 '불온 서적' 지정이 시대를 역행하는 갑작스럽게 이번 정부에 튀어나온 반동적 정책이 아니라 우리나라 정부에서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기조가 어쩌다 보니 수면 위로 드러난 것뿐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번 일이 기사화되자, 머리속에 가장 먼저 스쳐지나간 건, '어.. 이거랑 비슷한 일을 언젠가 기사에서 본 것 같은데... 설마 단순한 데자뷰인가;;' 라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몇년전까지 인터넷에서 기사들을 스크랩해두었던 기억을 되살려, 한참을 뒤진 끝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바로 그 주인공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맑스·리영희 책은 모두 이적표현물? (오마이뉴스)

아, 오마이뉴스 기사라 다 허구날조에 거짓부렁일것 같다고? 그럼 다 제끼고, 기사내에서 밝히고 있는 팩트만 잠깐 살펴보자.

".... 그간 우리 법원은 1000여개가 훌쩍 넘는 책과 문건에 '빨간딱지'를 붙였다. 법무부가 지난 2001년 인권운동사랑방의 정보공개청구로 공개한 '판례에 나타난 이적표현물' 목록에는 일반인의 상식을 뛰어넘는 수준의 책들이 다수 포함돼있다.

무려 1220여종에 이르는 이 리스트 중에는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이라 일컬어지는 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8억 인과의 대화>을 비롯해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박세길) <아리랑>(김산·님 웨일즈) <자유로부터의 도피>(에리히 프롬) 등 교양 필독서로 꼽히는 책들도 다수 끼어있다.

정치경제학 뿐만 아니라 인문사회학의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자본론>(칼 마르크스) <헤겔 법철학 비판>(칼 마르크스)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프리드리히 엥겔스)도 '이적표현물'이다. "


많이 양보해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그렇다 치자. 그런데 '1220종에 이르는' 목록에는 이적표현물이라고 보기엔 조금 코웃음 쳐지는 책들이 너무 눈에 띈다.  과연, '아리랑', '자유로의 도피'을 이적표현물로 볼 수 있을 까?

아, 여기서 또 태클 하나가 들어올지 모른다. 저거, 그냥 사문화된 목록에 불과한 거 아니냐고. 그러나 사실 그렇지 않다.

이 책들이 여전히 이적표현물? (한겨레)

"... 고등학생들의 논술교재로도 애용되는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지난 81년에 일찌감치 이적표현물로 낙인찍혔고, 70년대 지식인들에게 시대의식을 일깨워준 <전환시대의 논리>는 94년, <민중과 지식인>은 92년에 각각 이적표현물 딱지가 붙여졌다. 또 지난 1월 정부로부터 민주화운동 공로를 인정받은 고 전태일씨의 평전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도 90년에 이적표현물로 분류됐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존 리드가 러시아 혁명의 현장을 기록해 르포문학의 진수로 평가받고 있는 <세계를 뒤흔든 10일>에 대해서도 법원은 86년 “이적성이 있다”고 판단했고, 중국 혁명을 생생한 필치로 기록한 에드가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별>과 스노우의 부인이 지은 <아리랑>도 각각 85년과 86년에 이적표현물이 된 이래 교도소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법무부는 이들 도서를 비롯해 67~95년 법원이 이적표현물로 규정한 1220종의 표현물들에 대해 교도소내 반입 및 구독을 금지하고 있다.  ...."


  물론 위는 2001년 기사이기 때문에, 현재는 달리 적용되고 있을 지도 모르나, 특별히 상황이 바뀌었다는 소식은 찾을 수 없었다. 

  아직까지도 대한민국은 전쟁이 끝나지 않은 국가이고, 안보상 심각한 위협에 놓여 있다는 주장도 받아 들일 수 있기 때문에 '불온 서적', '이적 표현물'에 대한 제재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다. 그러나, 문제는 위에서 밝혔다 시피 현 상황에서 보기에 어처구니 없을만한 도서들이 '이적 표현물' 로 규정되어 사실상 국민의 사상의 자유를 침해할 충분한 소지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적표현물을 규정하는 기관은 현재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민주이념연구소, 공안문제연구소 등이 있다. 이런  법 집행기관이 직접 검열 및 사상 검증 등을 도맡고 있어 자의적(恣意的) 법적용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는 언제든지 합법적으로 '국민의 사상'을 통제할 수단을 가지고 있다. 지금 군 '불온서적' 지정 문제를 단순히 냉소하고,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 이상으로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적어도 자유주의의 상식으로 납득할 수 없는 문제가 21세기의 한국에서 버젓이 공식화되어 있는 건 부끄러운 일 아닌가.

- 현재 법규상 이적표현물은 다음과 같이 규정되고 있다.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로 인정되기 위하여는 그 표현물의 내용이 국가보안법의 보호법익인 대한민국의 존립·안정과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것이어야 하고, 표현물에 이와 같은 이적성이 있는지 여부는 표현물의 전체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그 작성의 동기는 물론 표현행위 자체의 태양 및 외부와의 관련사항, 표현행위 당시의 정황 등 모든 사정을 종합하여 결정하여야 한다" (대법원 2004. 8. 30. 선고 2004도3212 판결)

- 나는 지금 당장 국가 보안법 폐지에 아직 찬성하진 않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국민의 상식과 '안드로메다'만큼 거리가 있는 부분은 개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덧글

  • 깊고푸른 2008/08/04 03:04 #

    학문적으로 읽는 건 상관없고, 혁명을 준비하기 위해서 읽으면 위법이라는게 법원의 입장이니..
    두가지의 차이점이 뭔진 모르겠지만요..
    대한민국의 누구도 북한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지금..
    북한의 극도로 두려워하는 것은 체제단속차원일까요?
    아니면 북한이 그만한 힘을 가졌기 때문일까요?

    이적표현물이면 서점에서 수거해야하는 것이 아닐런지..
    그런 퍼포먼스 한번해주면 국제적 망신일텐데요..
    아직 대한민국은 북한이라는 존재때문에 매카시즘의 망령에 사로잡혀있는듯 싶네요..
    북한이 없어져도 매카시즘이 없어질 거라 생각되지 않는게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의 비극인 듯 싶네요..

    잘 읽고 갑니다.
  • 키치너 2008/08/04 15:51 #

    엄연한 법치국가에서 자의적인 해석으로 법을 적용한다는 게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저 책들을 이적표현물로 규정한 당사자들이 과연 진심으로 책에 쓰인 내용들이 '이적표현'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 의문이기도 하고 말이죠.
  • Julis 2008/08/04 16:01 # 삭제

    좋은 글이라 링크걸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좋은 글'을 포스팅하지 않아도 될 진짜 '좋은 때'가 오긴 할까요? 쩝.
  • 키치너 2008/08/04 17:31 #

    이런 문제로 고민해야 할 시기는 지난 것 같은데... 아직 '여명'은 오지 않은 듯 합니다.
  • ghistory 2008/08/16 01:46 #

    문제는, 이적표현물 판정의 근거가 되는 '고무 · 찬양죄' 가 현 단게에서 국가보안법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1990년대 이후 국가보안법 판결의 압도적 대다수가 이 조항 때문에 일어났지요. 이 조항만 삭제해도 국가보안법은 사실상 기능을 상실하게 됩니다만, 바로 그 때문에 이를 지키려는 세력이 막강하기도 합니다.
  • 키치너 2008/08/17 02:22 #

    네. 저 역시 국가보안법의 개인의 사상을 단죄하는 자의적인 잣대로서의 고무,찬양 규정은 매우 혐오하고 있습니다. 시민들이 저 규정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를 알지 못하니, 국가보안법 개정 또는 폐지가 공허한 목소리가 될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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