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 강도를 당하다

몰랐습니다.

제가 티비에서나 나올 법한 일을 겪을 줄은.

어젯밤 의대 동문회 선배분들과 신사역에서 술자리가 있었습니다. 자리는 1시즈음에 파했고, 제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 걸 보면 파할 무렵에 필름이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나 봅니다.

절 택시에 태워 보낸 선배의 말에 따르면, 택시를 탈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타고 갔다고 하는 데, 정신을 차려보니 집이 아니더군요.

새벽 3시 무렵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한 추위와 통증으로 정신을 조금 차려보니, 외투도 신발도 지갑도 핸드폰도 시계도 가방도 남은 게 없더랍니다. 어떻게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희미한 기억에 의존하면 택시에서 누군가에 의해 내려졌고 그때 이미 소지품은 모두 사라진 상태였던 것 같습니다. 그때까지 의식 수준이 혼미에 가까워 추위를 피하려 건물 계단을 오르다가 미끄러지기도, 지하철 역 안으로 들어가다가 넘어지기도 하는 등 수십분동안 거리를 돌며 다리며 팔이며 정강이, 무릎이 부딪히고 깨져 몰골이 말이 아니었죠.

이러다간 정말 동사하겠구나 싶어 양말만 신은 채 도로로 나가 어떻게든 택시를 잡아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몇번이나 빈 택시들이 지나갔지만 마음씨 좋은 젊은 택시 기사분이 정말 어처구니 없는 제 행색을 보고도 차를 세워서 집까지 태워주시더군요. 아마 그 분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 지.. 집 앞에 도착하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아무것도 지닌 게 없었기에 기사분께는 잠시만 기달려 달라고 하고 집에 들어가 저금통을 뒤져 동전을 한움큼 들고 나가 기사분께 드렸습니다. 택시요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금액이었지만, 고마운 기사 아저씨는 오히려 어디서 폭행당해서 도망쳐나온 게 아니냐며 걱정을 해주시더군요. 지금 생각하면 성함이라도 알아둬서 감사의 인사를 드렸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집에 들어와,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습니다. 불과 수시간 전에 벌어진 일들이 꿈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경찰서에 가서 사건 접수를 하고, 조금전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늘 아침에 못난 자식의 전화를 받고 부모님이 놀라 고향에서 달려오셨는 데, 정말 부모님께는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이제 다큰 성인이 된 아들이 이런 못난 모습을 보여드리다니 말입니다.

아직도 오늘 새벽의 일이 믿기지가 않습니다. 만약 깨어나지 못했다면, 잘못해서 사고라도 났다면, 강도가 조금만 더 악한 마음을 먹었다면 전 이미 제 의지대로 몸을 가눌 수 없는 처지가 되었겠죠.

정말 세상이 무서운 곳이구나 라는 생각을 뼈저리게 느낀 너무나도 긴 하루였습니다.

핑백

  • 늑대별의 이글루 : 연말입니다. 밤길 조심... 2010-11-29 23:21:11 #

    ... 택시 강도를 당하다 by 키치너님이글루스 이웃이신 키치너님께서 큰 일을 겪으셨네요. 그만하기 다행입니다만...연말이고 술자리도 많아지는 만큼 정말 조심해야겠습니다.오래전 ... more

덧글

  • Luthien 2010/11/28 22:57 #

    직접 피해사례 듣는건 처음이네요, 그래도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
  • 키치너 2010/11/29 12:18 #

    감사합니다. 정말 다시 생각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군요.
  • 카이 2010/11/29 00:07 #

    큰일날 뻔했습니다..
    감히 본4를 건드리다니... 꼭 잡아서 뼈저리게 후회하게 만들어주세요^^
  • 카이 2010/11/29 00:07 #

    ps. 그래도 무사하다니 다행이고, 그 택시아저씨 만난 것도 다행입니다.^^
  • 키치너 2010/11/29 12:19 #

    정말 운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 한단인 2010/11/29 00:09 #

    정말 무서운 세상입니다... 그래도 어디 크게 다치시진 않으셨으니 다행이군요. 꼭 그 놈들 감옥에 잡아 쳐넣어야 할텐데..
  • 키치너 2010/11/29 12:20 #

    제가 이런 일을 당할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이제 택시도 안심하고 못 탈 것 같네요.
  • AyakO 2010/11/29 04:19 #

    헐퀴... 몸 성하게 끝났으니 어찌보면 다행인 걸까요...
    신고하셨으니 꼭 잡았으면 좋겠습니다. (기대할 수 있을까 ㅠㅠ)

    그나저나 감히 본4를 건드리다니...(2)
  • 키치너 2010/11/29 12:21 #

    하아~ 오늘 새벽에 내린 눈을 보니, 눈이 하루만 더 빨리 왔으면 어떻게 되었을 까 상상이 들더랍니다.
  • 늑대별 2010/11/29 07:43 #

    아이고...이런이런...큰일을 겪으셨네요. 그래서 요즘 세상이 정말 무섭다는 걸 느껴요. 그래도 그만하신게 천만다행...
  • 키치너 2010/11/29 12:23 #

    감사합니다. 정말 큰일 안 당한 게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취객들 상대 범죄가 늘고 있다는 걸 뉴스로는 자주 봤지만 제가 그걸 당할 줄은 몰랐습니다.
  • 위장효과 2010/11/29 09:03 #

    어제 밤에는 날씨도 추웠는데...고생많으셨습니다.
  • 키치너 2010/11/29 12:24 #

    부모님은 액땜했다고 생각하라는 데, 사실 스스로도 크게 반성 중입니다. 한번도 술 마시고 필름 끊겨본 적이 없다고 과음을 한 탓이였으니까요. 앞으로 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겠습니다.
  • 네비아찌 2010/11/30 00:58 #

    아아... 정말 천운입니다.
    많이 놀라셨을텐데 마음 안정 찾으실 수 있길 빕니다.
  • 키치너 2010/11/30 13:01 #

    감사합니다. 역시 새벽녘에 당한 일이라 아직도 몸이 쑤시네요 ㅠ
  • Polycle 2010/11/30 01:40 #

    본4를 건드리다니 간도 큰 녀석들이로군요. 그래도 무사하시니 다행입니다.
  • 키치너 2010/11/30 13:02 #

    정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생각해도 황당한 일이에요.
  • MAC 2010/12/02 00:26 #

    다음부턴 꼭.... 모닝케어를;;;;
    이런 말씀드릴려고 하는 건 아니었는데.

    그래도 크게 다치지 않으셔서 다행이예요!
  • 키치너 2010/12/02 01:23 #

    하하;; 사실 그날 여명 808을 미리 사들고 갈까 했다가, 마셔봤자 얼마나 마시겠냐 했더니 이런 일까지 겪어버렸지 뭐예요.

    아무튼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 2010/12/04 05:21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키치너 2010/12/04 11:00 #

    최근에 블로그에 들렸다가 문이 닫혀 있길래 '개인적인 사정이 생기셨나 보다'하고 짐작은 했습니다만, 힘든 일을 겪고 계셨군요..

    저도 아주 어렸을 적에 아버지께서 교통 사고로 생사의 기로에 서셨던 적이 있기에, 느끼셨을 당혹감과 안타까움이 머릿속에 그려지네요.

    어머니 간병에 정신 쏟기에도 심신 모두가 지치셨을 텐데 제 안부를 물어주셔서 웬지 죄송한 마음까지 들면서 감사의 말씀을 드려봅니다. 어머님이 빨리 일어나셔서, 이번 일이 이후에 단지 한 때의 추억으로 기억되시길 기원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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