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 - 일차 세계대전

느린 도화선 - 히틀러의 일차 대전의 경험 (6) : 完

  9월말 독일군 최전선부대는 무너져갔다. 넓게 퍼져있던 독일군은 연합국이 곧 시작할 'Big Push'에 맞서 살아남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군의 경험에 미군의 기세가 합쳐지자 가차 없는 위력을 발휘했다. 독일군은 펀치에 맞고 또 맞아가면서 후퇴했다. 카이저의 병사들은 무기의 불확실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기가 소모품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독일 당국은 대중뿐 아니라 정치인들로부터도 진실을 숨기는 데 성공했다. 10월 2일, 제국의회 의원들은 평화협상이 거의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 이미 상처입은 국민들의 사기는 빠르게 무너졌다. 이것은 단순히 협상의 불가피함을 재촉하는 것일 뿐이었다. 보이지 않는 끈에 조종되는 반역자들의 비밀스런 음모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 독일의 패배주의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1918년 10월, 리스트 연대는 남 이프르로 가는 웨익(Werwick)에서 만신창이가 되어있었다. 10월 13,14일 밤, 히틀러는 영국군의 가스 공격을 당했다.

연합군의 진격에 전사한 독일군 기관총 사수

  히틀러는 독가스 때문에 잠시 시력을 잃었고 다음날까지 서있을 수도 없었다. 이 부상 때문에 그는 pasewalk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고 그리고 그곳에서 그의 전쟁은 끝났다.

  히틀러의 병사로서의 일차 세계대전의 이력은 별난 게 아닐 뿐 아니라, 불쾌하게 느낄지도 모르지만, 훌륭한 것이었다. 그는 한 번도 책임을 피하려 하거나 위험에서 도망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용감했기에 일등철십자훈장을 포함한 수많은 표창장과 상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군인다운 무용의 외면 아래에서 곪아가고 있던 것은 악취나는 과격주의의 정수, 무모한 과학적 개념들과 뒤틀린 인종이론이었다. 히틀러의 일차세계대전을 조사하는 동안 우리는 악마의 탄생을 보았다. 방랑하던 무일푼의 거렁뱅이에서 전장에서의 자랑스러운 공훈을 정치적 목적으로 자랑하며, 그래서 동료들의 존경을 모을 수 있는 베테랑으로 변해가는 악마를 말이다.

  11월 10일, 그가 가진 전쟁 경험의 자긍심은 패배의 쓴맛과 결합했다. 그것은 치명적인 칵테일이었다. 그것은 그에게 힘을 추구하게 했고 결국에 제3제국을 일으키게 했다. 히틀러와 그의 나치 부하들에게 1914-1918년은 단지 끝나지 않은 전쟁이 아니라 미래의 거대한 투쟁을 어떻게 만들어나가야할 지에 대한 청사진이었다. 그래서 끝난 전쟁의 잿불은 또다른 전쟁의 퓨즈를 점화시킨 것이다.

기고자 - Simon Rees

느린 도화선 - 히틀러의 일차 대전의 경험 (1)
느린 도화선 - 히틀러의 일차 대전의 경험 (2)
느린 도화선 - 히틀러의 일차 대전의 경험 (3)
느린 도화선 - 히틀러의 일차 대전의 경험 (4)
느린 도화선 - 히틀러의 일차 대전의 경험 (5)

(이 글은 Feature Articles: A Slow Fuse - Hitler's World War One Experience을 번역한 글입니다)

끝났습니다. 심심풀이로 시작해서 빨리 끝내려고 한 글이 무려 3개월(-_-;;)이나 걸렸습니다. 사실 1차 세계 대전에서 2차 세계 대전에 이르기까지, 즉 전간기의 히틀러의 모습이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것과는 달리 전전(戰前)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은 것은 예전부터 궁금해하던 것이었습니다. 히틀러의 일차세계대전 참전 경험은 단순히 그에게 "철십자훈장"으로 상징되는 구 제국의 자긍심의 역사였을 뿐이었을 까. 아니 그렇게 당대의 유럽인들의 정신세계를 혁명적으로 바꿔놓은 "Great War"가 히틀러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을 까. 하는 의문과 함께 말이죠.

이 짧은 글에 담긴 히틀러의 모습은 제목 그대로, 글 말미에 담긴 그대로 이차세계대전을 불러 일으킨 진정한 도화선이었지않나 싶습니다.

by 키치너 | 2008/07/20 03:43 | - 일차 세계대전 | 트랙백 | 덧글(0)

The Great War가 결국 문 닫혔네요 ㅠㅠ

- 국내 유일의(?) 1차 세계 대전 전문 포럼이었던 The Great War (greatwar.pe.kr)

   얼마전부터 페이지가 열리지않아서 조금은 걱정했지만, 그전에도 종종 있었던 일이라 곧 열리겠지 하고 넘어갔는 데, 오늘 확인해보니 결국 포럼이 닫힌 걸로 확인되더군요. 이미 한번 문 닫힌 이후 재개장하면서 상당수 자료가 소실되었고, 조금은 아쉬운 면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사실상 일차 세계 대전에 대한 지식의 갈증은 여기서 다 해결할 수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 하지만 이젠....  없다.

   사실상 국내에서 일차 세계대전을 다룬 사이트가 전무한 가운데, "the greatwar"가 문 닫은 건 정말 안타깝습니다. 물론 외국어로 쓰여진 좋은 사이트들도 있지만, 역시 "우리말"이 편한 건 사실이죠. ㅠㅠ

   이차세계대전의 페리스코프(http://www.periskop.info)가 다시 부활했듯이, 일차세계대전의 그레이트워(http://greatwar.pe.kr)도 화려하게 재개장할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 정말 한국에서 "일차세계대전" (주)매니아를 찾기는 힘든가 봅니다. 관심이 있는 분들도 대개는 주 관심분야는 이차세계대전이고, 곁다리로 일차세계대전를 취급(?)하시는 분들이니... 물론 일차세계대전 자체가 이젠 워낙 먼 시대이고, 한국이 직접적으로 엃혀든 전쟁도 아닌데다, 세계대전이라고 말은 하지만 사실상 유럽전쟁이었던 것과 이차세계대전과는 달리 지루한 참호전이라는 이유로 설명할 수 있긴 하지만 그래도 서운해요 ㅠㅠ

by 키치너 | 2008/07/19 22:54 | - 일차 세계대전 | 트랙백 | 덧글(0)

느린 도화선 - 히틀러의 일차 대전의 경험 (5)

느린 도화선 - 히틀러의 일차 대전의 경험 (1)
느린 도화선 - 히틀러의 일차 대전의 경험 (2)
느린 도화선 - 히틀러의 일차 대전의 경험 (3)
느린 도화선 - 히틀러의 일차 대전의 경험 (4)

  서부 전선의 전황을 바꿔버린 가장 큰 사건 중 하나는 머나먼 동쪽에서 발생했다. 짜르의 몰락과 볼셰비키의 집권으로 야기된 혼란을 기회로, 독일은 그들의 요구를 러시아에 강요했다. 동부전선이 안정되자 독일은 병사, 물자, 병기들을 '대침공'을 위해 서부전선으로 옮길 수 있었다. 1918년 서부전선에서 연합군의 대공세를 막아내는 데 성공한 독일군은 새롭게 단결심으로 충만해졌다.

  "마지막 공격과 최초의 두번의 공격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내 삶에 그 경험은 엄청난 인상을 남겼다." 히틀러가 느꼈던 확신은 올바른 것이었을까? 그건 사실이었다. 독일의 준비상태는 훌륭했고, 사기도 매우 높았다. 심지어 독일군은 새로운 전술을 적용하고 있었다 - 그 전술의 요체는  수준 높은 작전행동이 가능한 작은 규모지만 고도로 무장된 돌격대에 있었다. 그러나 이런 모든것 뒤에는 잠복된 임박한 재앙이 도사리고 있었다 - 그것은 사실상 독일이 던졌던 마지막 주사위였고, 수뇌부의 대부분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1918년 교전중인 미군

  미군 병사, 총기, 공군기가 프랑스로 밀물 밀려오듯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미국의 산업력과 압도적인 인력 공급은 독일의 숨통을 죄어온 해양 봉쇄의 효과와 합쳐져 1919년의 봄 또는 1918년의 겨울에 이미 독일의 패배를 기정사실화했다. 결국 독일은 강력한 강타 한방에 연합국에게 쓰러져버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리스트 연대는 슈멩데담(Chemin Des Dames)를 재점령하라는 명령을 받고 전장으로 나갔다. 6월말 경 독일군은 마른에 이르렀고, 프랑스의 수도를 타격거리내에 두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부 몽상에 불과헀다. 독일군이 파리까지 진격했다고 해도, 그들은 파리를 점령해야 했고, 2차 세계 대전에서 본 것처럼 방대한 도심지역을 점령하는 것은 공격측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것이었다. 미군 병사들과 그 물자들이 도착하자, 연합군에게 거대한 반격을 전개하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연합군의 반격을 상쇄하기 위한 독일군의 공세는 장엄한 것이었지만, 결코 (전세를 바꿀만큼) 충분하지않았다.

  1918년 8월 4일 독일군이 한창 마지막 대공세를 펼치고 있을 무렵, 히틀러는 '총체적인 공훈와 개인적인 용맹'을 기리는 1등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는 혼자서 참호에 모여있던 프랑스군 한 무리를 손쉽게 포로로 잡았던 것이다. 교활하게도 히틀러는 프랑스군의 임시 방공호의 귀퉁이까지 기어가서 그들이 이미 포위되었고 항복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소리쳤다. 히틀러의 계책에 속아 그 프랑스군들은 저항하지도 않고 밖으로 나와 모두 포로가 되었다. 권력을 잡은 뒤, 나치의 선전원들은 명백히 히틀러가 잡은 포로의 숫자를 늘렸고 그 실수는 총통이 기뻐했기에 교정되지 않은 채로 남겨졌다.
히틀러의 철십자 훈장들

  1등 철십자 훈장은 히틀러에게 그가 간절히 열망해왔던 보상, 인정, 그리고 지위를 가져다 주었다. 이 포상은 사관들에게는 드문 것이었고 더구나 임관되지 않은 계급을 가진이에게는 더욱 더 희귀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의 용맹, 영예, 그리고 잠재 의식수준에서의 인종적 우월성에 대한 공식적인 인정이었다.  다른 나치 지도자들은, 특히 유별났던 괴링은, 스스로에게 훈장과 술이 달리고 빛나는 견장을 달았지만, 히틀러는 단지 그의 철십자 훈장을 찼을 뿐이다. - 그것은 바로 그에게 영예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이 글은 Feature Articles: A Slow Fuse - Hitler's World War One Experience을 번역한 글입니다)

거의 끝나갑니다. 다음 편이 마지막이 될 듯 싶군요.

by 키치너 | 2008/07/11 11:30 | - 일차 세계대전 | 트랙백 | 핑백(1)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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