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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동맹(Holy Alliance) - 근대에 나타난 마지막 중세의 반동?

  "들어보셨습니까? 신성동맹"
  
  신실한 종교인을 자부하며, 그닥 겸손함을 겸비하지 못한 이라면 자신이 구상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그가 믿는 신의 가호를 서리기를 바라마지 않을 것이다. 이 이름만으로도 뭔가 해당 종교를 믿는 이들에게 아릿아릿한 감정을 불러올 것만 같은 이 "동맹"은 이름 그대로 '신의 이름으로 세계-물론 그들의-의 질서를 세우며, 세계의 주권을 다시 신에게로 돌리'려는 거대한 역사적 반동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1815년, 그 무시무시했던 "혁명 프랑스"의 대괴수™ 나폴레옹을 유럽의 정치사에서 퇴장시킨 러시아의 짜르 알렉산드르 1세는 유럽 외교 무대에서 강력한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 것은 그에게 '신'이 내려준 사명을 실현할 기회였다. 무법자™프랑스를 무릎 꿇리고, 유럽에 영광이 가득했던 옛질서를 다시 가져온 러시아의 짜르는 "영혼의 동맹"이 가능하다고 믿는 독신자였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사고는 알렉산드르 1세만의 전유물은 아니었고, 당시 유럽 사회엔 과격한 기독교 부흥에 관한 이론들이 횡행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주창자로는 신정정치를 이상으로 제시한 '무명의 철학자' 생 마르탱, '노발리스' 하르덴베르크 백작, 바아더, 크뤼데네 부인이 있는 데, 이들은 알렉산드르 1세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아무튼, '성서'의 가르침대로 지상에 평화를 구축하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확신하게 된 알렉산드르 1세는 그것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는 데, 그는 파리에 입성한 후 "혁명 광장-현 콩코르드 광장-"에서 연합군을 사열하면서 루이 16세를 처형한 그 자리에 제단을 설치하고 목사들로 구성된 7개 연대로 하여금 합창가를 부르게 했다. 그는 직접 제단에 나아가 기도하였고, 뒤이어 프랑스 장군들은 앞 다투어 러시아의 십자가에 입맞추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신의 사명을 받았음을 느꼈으며 프랑스의 불행(?)을 구제해야 된다고 확신하였는 데, 이 와중에서 그는 크뤼데네 부인을 만나 그의 종교적 열정을 정치적인 활동으로 옮길 것을 다짐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르 1세는 크뤼데네 부인과의 만남에서 마치 목자를 만난 양인양 감동의 눈물을 흘렸으며, 그와 크뤼데네 부인 사이의 대화를 기록한 크뤼데네 부인의 딸 줄리에트의 일기에서는 두 사람이 주로 몇 가지 주제에 대한 집중적인 대화를 나눴다고 전해진다. 그것은 바로 교회를 다시 재건해야 된다는 것, 기독교 정신으로 인류를 구제해야 된다는 것, 이런 위업을 이룩할 수 있는 사람은 알렉산드르 뿐이라는 것, 그리고 패전국인 프랑스를 다시 구원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점차 알렉산드르 1세는 인류를 구원해야 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는 데, 그에게 인류의 구원에 대한 사명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준 사건이 있었다. 1815년 9월 11일 베르튀(Vertus) 근처의 평야에서 15만 러시아 군대의 사열에서 알렉산드르 1세는 프로이센의 빌헬름왕과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황제를 양 옆에 둔 자리에서 전 군의 미사를 진행했고, 그는 스스로 연출한 이 광경에서 장엄함과 숙명을 느꼈다. 탕아가 되버린 "교회의 맏딸" 프랑스에 대한 깊은 연민과 구원에 대한 고민, 고양된 종교적 열정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신성동맹"의 구상이 구체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알렉산드르 1세가 신성동맹의 초안을 사람들에게 최초로 보여 준 것은 1815년 9월 18일경이었다. 다음날 알렉산드르 1세는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에게 이 초안을 보냈고, 프로이센의 국왕, 빌헬름도 곧 이 초안을 받았다. 프란츠 황제는 조약안이 탐탁하지 않다고 메테르니히에게 말했고, 메테르니히 역시 조약안을 보고선 ,조약으로서는 성립될 수 없는 내용이라고 판단했다. 프로이센의 빌헬름왕역시 같은 의견이었는 데, 그들은 신성동맹은 "종교의 외투 밑에 있는 박애의 열망"에 불과한 것이라고 혹평하였다. 이런 반응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르는 초안의 일부 문구를 수정하는 것으로 신성동맹을 어떻게든 성립시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전문(前文)과 3개 조항으로 구성된 매우 간략한 문건인 신성동맹의 조약문은 메테르니히에 의해 수정되었는 데, 메테르니히는 현실적인 그리고 보수적인 그의 입장에서 이 조약문을 수정했으나, "성경"의 말씀을 현실의 정치세계에 접목시킨 신성동맹의 조약의 기본성격마저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前文. 지난 3년을 특징지었던 대사건들의 결과로, 특히 신의 섭리에만 신념과 희망을 둔 국가들에게 내려진 축복의 결과로, 열강들이 그 상호관계에 있어서 채택되어야 할 방향은 우리들 구세주의 성스러운 종교가 가르치는 숭고한 진리에 입각할 필요가 있다고 깊은 확신을 얻게 되었다. 이 문서는 온 세상 앞에 자국의 운영에 있어서나 다른 정부와의 정치관계에 있어서나, 신성한 이 종교의 가르침, 정의의 가르침, 사랑과 평화의 가르침- 이들 가르침은 인간의 제도들을 공고히하고 그 불완전한 것을 교정하는 유일한 수단으로서 오로지 사생활에만 적용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 반대로 군주들의 결의들과 행동에 직접 미쳐야 하는 데 -을 그들의 유일한 지침으로 삼는다는 확고한 신념을 알리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음을 엄숙히 선언하면서 세 군주들은 다음의 조항들에 합의한다. 

  1조. 모든 인간은 서로 형제라고 가르친 성경 말씀에 따라서 세 군주들은 진실하고끊을 수 없는 우애의 결속으로 단결되어 있고 세 군주들은 서로가 같은 나라의 사람들이라고 간주함으로써 어떤 경우나 또 어디에서나 서로 원조와 지원을 보내 주며 자신들은 자국의 신민과 군대에 대하여 가장(家長)으로 자처하여 세 군주들이 종교, 평화 그리고 정의를 보호하려고 하는 그런 박애의 정신으로 이들 신민과 군대를 지도한다. 

  2조. 따라서 체약국 정부나 그들 신민이나 그 사이에 유일하게 효력을 갖는 원칙은 서로 원조를 제공하는 원칙, 변함없는 선의로써 상호 애정을 서로 표시하는 원칙, 같은 기독교 국민의 구성원이라고 서로 간주하는 원칙인 것이다. 세 군주들은 신의 섭리에 의하여 한 가족의 세 분파 즉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를 통치하도록 위임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함으로써 자신둘과 자신들의 신민들은 기독교 국민의 일부에 불과하며 이 기독교 국민들은 실제로 모든 권력이 귀속되는 신 이외에는 어떠한 주권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바이다.
  
  3조. 생략

  아이러니컬하게도, 위와 같이 종교적인 관점으로 현실 정치를 바라본 "신성동맹"에 대해 교황은 이러한 종교적인 동맹에 가입할 수 없다는 입장을 처음부터 분명히 하였다. 또한 미국은 1816년 3월, 알렉산드르로부터 가입을 요청받은 이래 계속 가입을 미루다가, 1820년 국무장관 애덤스가 미국은 유럽체제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기본정책이라고 가입 거절을 분명히 함으로써 신성동맹의 일원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영국역시 당시 섭정이었던 조지(이후 조지 4세)가 신성동맹에 대한 혹평에 가까운 카슬레이의 보고와 동맹의 숭고한 정신에는 찬성하지만 영국 헌정의 전통에 따라 섭정이 조약의 가입을 결정할 수 없다는 수상이었던 리버풀의 의견에 따라 가입을 거절하였다.

  조약의 완성은 오래걸리지 않았지만 애초에 탐탁지 않게 생각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반대로 조약문의 정식 발표는 계속 미뤄지다가 세 군주가 적당한 시기라고 서로 동의하는 시점에 가서 발표하기로 합의가 되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가 그의 군대와 함께 러시아에 돌아오게 되자, 그는 자신이 구세주라는 것을 국민에게 보여주고 싶었고, 그의 신비주의 친구들에 경도되어 1815년 성탄절에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동의없이 일방적으로 신성동맹의 전문을 발표하게 된다. 그는 조약 전문의 공개와 동시에 자신의 조약 원안에 함축되어 담겨있던 사상을 길게 발표했다. 이러한 알렉산드르의 일방적인 행동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양국의 입장을 난처하게 하였다. 신성동맹에 대해 정부의 공식적인 발표보다도 언론에서 러시아에서 성탄절에 발표된 알렉산드르의 연설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여 다음해인 1816년 2월에, 『프랑크푸르트 신문』Journals de Francfort (2월 2일), 『세계 신보』 Moniteur universal (2월 6일)에서 각각 보도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1816년 11월 15일, 결국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던 메테르니히가 신성동맹에 대해 처음으로 입장을 밝혔다. 그는 신성동맹은 단지 원칙의 표명에 불과하며 군주들의 의사만을 표시한 것이고, 대신들의 부서도 없는 문서라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이런 문서로부터는 아무런 법률적 의무도 나오지 않고, 다른 동맹조약과는 달리 의무규정역시 존재하지 않는다고 천명하였다. 다시 말해, 오스트리아는 이런 신성동맹 조약에 의해 아무런 법적 구속도 받지 않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종교적 정신을 현실 정치에 이식하려 한 "신성동맹"은 당대에서부터 많은 해석과 논란, 그리고 평가가 있었다. 위에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영국의 카슬레이,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 겐츠는 신성동맹을 비판하고 냉소적인 태도를 가졌는 데, 카슬레이는 수상 리버풀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신성동맹 조약은 "숭고한 신비주의와 넌센스"라고 혹평했으며, 메테르니히는 그의 회고록에서 "공허하고 요란한 유물"이라고 일축했고, 겐츠는 신성동맹 조약이란 어떤 실제적인 목표를 갖고 있지 않으며 정치적으로 무효라고 규정하면서 "19세기 외교문서집 속에 괴이한 유물로 남을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이렇게 당시 주요국 정치인과 정책 결정자로부터 의미 부여는 커녕, 비웃음의 대상이었던 신성동맹은 이번엔 1820년 이후 19세기 자유주의의 가장 큰 적으로, 인민의 억압, 혁명 세력의 진압, 반민족주의의 대명사로 평가되었다. 이후, 영국의 필립스가 신성동맹의 긍정적인 측면을 최초로 부각시키려고 시도하면서 신성동맹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는 데, 제 1 차 세계대전 후 국제연맹의 창설을 계기로 국제기구의 선구적인 예로 찬양되기 시작하였으며, 제 2 차 세계대전 후 국제연합이 탄생되자 다시 국제기구의 선례로서 신성동맹이 각광받게 되었다.

 분명한 것은. 짜르 알렉산드르 1세의 종교적 신념에 의해 탄생된 신성동맹은 이른바 "장기 19세기"의 전반기동안 유럽협조체제를 지탱하는 한축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유럽협조체제가 신성동맹만으로 유지된 것이 아니며, 장기 19세기동안 유럽내 불화와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당대의 평가처럼 혹평만으로 가득채워질 조약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Reference : 1. 세계외교사, 서울대 출판부, 김용구 ,2006
2. 유럽외교사(상), 까치,  르네 알브레히트-까리에 저/김영식, 이봉식 역, 1985
3. 제국의 종말 :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AD1848-1918,  가람기획, 타임라이프북스 저/김훈 역, 2005

by 키치너 | 2009/01/16 01:14 | 역사 | 트랙백 | 덧글(10)

일차세계대전으로 가는 길 - 비스마르크 체제와 삼제 동맹

  메테르니히 체제가 성립된 이래 이후 역사가로부터 장기 19세기라고 불릴정도로 안정을 구가하던 유럽 정치 체계가 서서히 파국을 향해 달려가 결국 세계대전이라는 "대지진"을 겪게 된것은 프로이센에 의한 독일 통일에서 그 진원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프로이센(주1)은 이미 메테르니히 체제이후 유럽의 열강 중 하나였으며,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자면 베스트팔렌 조약에서부터 유럽 정치사에서의 확고한 위치를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 통일은 프로이센에게 유럽 체제내에서 어느정도 위치를 인정받는 국가가 아니라, 세계적 패권국의 자리를 겨냥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곧 장기 19세기의 파국을 불러왔다. 이는 곧 기존의 세계적 패권국이었던 독일이 영국, 프랑스와의 경쟁에 뛰어드는 것으로 발전하였고, 독일 자신에서도 영국, 프랑스 주도의 현상유지를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게 하는 자기 최면적 암시에 빠져드는 단초가 되었다. 물론 모든 것이 처음부터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 독일 통일에 의한 유럽 체젱내에서의 역학 변화는 'concert of europe'에 균열을 가져왔지만, 장기간 유지된 유럽내에서의 평화는 이런 파열음을 막아내려는 관성으로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러시아가 프랑스와의 전쟁에 돌입하기전까지는 아무도 기존 체제가 붕괴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보불전쟁 이후 모든것은 바뀌었다. 복수심에 불타는 프랑스, 유럽내 분쟁 관여보다는 이미 건설한 세계 제국의 운영에 관심이 쏠려있던 영국, 프랑스를 넘어 유럽대륙의 패권국이 되고자 했던 독일, 나폴레옹 전쟁이후 열강의 위치에 오르고 그 지위를 유지하고 싶었던 러시아, 열강들의 자리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고 싶어 했던 이탈리아, 이렇게 서로 다른 의도와 목표를 가진 유럽국가들은 이후 이합집산을 거듭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갈등이 자라났다. 파국은 피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한 국가, 한 개인이 막기엔 너무나도 복잡한 관계로 서로를 옭아매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부터 19세기 유럽 정치사를 따라가면서 이 과정을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 보불전쟁 이후의 유럽 세력도, 30년후 이 지도는 누더기가 된다.


  독일 통일 이후 일련의 과정은 외교정책의 섬세함, 해결과정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었다. 직관과 경험이 정책의 성공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대부분의 외교 정책은 국가의 안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간주되기 떄문에 최고 정책 결정자의 의사는 논쟁없이 그대로 반영되는 경우가 많다. 독일 통일은 전후하여 독일의 권력은 왕인 빌헬름 1세가 가지고 있다기 보다는, 재상이었던 비스마르크에게 위임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유럽내 역학에 대해 뚜렷한 철학이나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를 전적으로 신뢰한 것은 아니었으나, 비스마르크는 사실상의 "협박"과 실적을 바탕으로 빌헬름 1세에게서 권력의 위임을 받아 낼 수 있었다. 이렇게 사실상 독일의 외교 정책을 결정하게 된 비스마르크는 본질적으로 보수주의자로서 유럽 협조 체제라는 판 자체를 깨뜨릴 생각은 없었다. 그로서는 독일의 우위만 인정된다면, 더 이상의 갈등은 불필요 할 뿐 아니라, 오히려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비스마르크 정책의 기본 방향은 프랑스를 짓밟고 러시아를 떠 받치는 것으로 구현되었다. 독일에게 패배한 프랑스의 감정을 잘 알고 있었던 비스마르크는 중부 유럽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독일의 지정학적 약점을 잘 알고 있었고, 프랑스가 러시아와 손을 잡게 된다면 애써 이룩한 독일의 우위에 기반한 유럽 체제는 파괴될 것이 자명하다고 보았다. 독일에게 프랑스 또는 러시아와의 단독 분쟁은 충분히 수행가능한 것이나, 양면 전쟁은 결코 있어서는 안되는 것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와 러시아의 관계를 떨어뜨리고, 러시아와 우호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삼제 동맹은 비스마르크의 고심이 담긴 독일황제의 혈연적 지위와 공화주의에 대한 러시아의 거부감, 오스트리아-러시아의 경쟁 관계를 이용한 절묘한 외교적 산물이었다. 삼제 동맹의 형성은 프랑스의 고립을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통일 이후 독일 주도의 유럽의 평화를 지향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었다. 삼제 동맹의 중심에 독일을 놓음으로써 이후 유럽내의 정치 외교적 상황은 베를린에 의해 조정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비스마르크는 실제로 그가 권력의 중심에 있음으로써 이를 성공리에 수행했고, 의도대로 유럽내의 분쟁을 방지했다. (쇤부른에서의 삼제동맹-三帝同盟(주2), Tri kaiser alliance) 

- 문제는 오로지 피와 철로서 해결된다고 연설하여, 오늘날 군국주의자의 대표적인 인물로 뽑히는 비스마르크, 하지만 그도 본질적으로는 현상유지를 꾀했던 평화애호가(!)였다.

  한편, 1873년 프랑스는 프러시아에게 배상금 전액(50억 프랑) 지불을 끝냈다. 이는 비스마르크의 예상보다 훨씬 이른 시기였는 데, 이는 배상금 문제를 프랑스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자 했던 그의 의도를 빗나가게 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또, 제국 통일 이후 비스마르크는 교황을 방패로 삼은 가톨릭 중앙당과 가톨릭에 대해 강경억압정책을 폈는 데, 이것이 바로 문화투쟁(Kulturkampf)이다. 약 8년에 걸친 가톨릭과 독일국가-사실상 프로이센-사이의 투쟁은 비스마르크가 반 가톨릭적 정책을 철회하는 것으로 끝이 났는 데, 결과적으로 이는 가톨릭 중앙당의 온건화를 유도했다. 이후 가톨릭 중앙당은 1차세계대전 발발까지 다시는 제국 정부에 공공연한 반대의사를 표명하지 못했는 데, 이로써 독일내 정치 구도를 안정화시키고 강력한 중앙 집권적 체제를 굳히려는 비스마르크의 의도는 사실상 달성되었다.

 
- 비스마르크 체제를 허물고자 했던 프랑스의 외상 델카세

그러나 문화투쟁은 독일밖에 새로운 문제를 가져왔다. 과거로부터 "로마 가톨릭의 맏딸"로 자부하던 프랑스와의 긴장 관계를 고조시킨 것이다. 독일과의 분쟁을 야기할 효과적인 명분을 찾고 있었던 프랑스 외무장관 델카세는 프랑스-프러시아 관계를 시험해 보고자 하였다. 프로이센 내부에서도 프랑스가 너무 빠르게 힘을 되찾는 것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고, 비스마르크는 예방전쟁까지 고려하고 있음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델카세가 의도한 것이었고, 그는 독일이 유럽 평화 체제를 파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유럽 각국에 호소하였으며, 영국 타임즈에도 그의 주장을 기고하여 독일의 침략적 의도를 규탄하였다. 이에 대해 영국에서는 프랑스에 동정적인 여론이 형성되었으며, 러시아 역시 프랑스가 더 이상 약화되는 것을 방관할 수 없다며, 베를린에 특사를 파견하여 보-불 관계를 중재하려 하였다. 특히 러시아 외상 고르챠코프(일전의 알벤스레벤 조약의 당사자)는 전쟁 발발시 러시아는 좌시하지 않겠다고 비스마르크에게 경고를 하였다. 이것이 바로 1875년 전쟁 소동이었는 데, 이 때 비스마르크는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프랑스에 대한 침공의사가 전혀 없음을 천명해야 했다. 이 일로 러시아의 고르챠코프는 기고만장하였으며, 자신이 유럽의 평화를 지켜냈다고 생각했다. 이 소동으로 인해, 비스마르크는 유럽각국이 프랑스의 약체화를 결코 바라지 않으며 오히려 독일의 팽창주의적 의도를 매우 경계한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애초의 정책에 대한 변화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계기로 비스마르크의 외교 정책은 더욱 정교하고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수 많은 비밀협정과 협상으로 이뤄진 비스마르크의 외교는 마치 거미줄처럼 얽히게 되었고, 이는 비스마르크가 권력을 잡고 있었을 때는 그럭저럭 유지될 수 있었으나, 그의 후계자들은 그의 거미줄을 모두 파악할 수 없었고, 파악하였다고 하더라도 수행할만한 능력을 결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 우위에 의한 유럽 평화는 서서히 붕괴하고 있었다. 또, 비스마르크가 권력을 잡고 있었을 때부터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 근동 문제는 비스마르크 자신이 "한낱 새 뼈다귀만도 못한 것"이라고 일컫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외교 정책의 핵심인 러시아와 오스크리아의 협력을 방해했을 뿐 아니라, 갈등을 야기하여 결국 비스마르크 실각이후 비스마르크 체제의 붕괴를 가져온 초석이 되었다. 즉, 문제는 동방의 병객, 오스만 제국에서 오고 있었던 것이다.

주1. 프로이센의 독일 통일 이후, 프로이센의 왕은 독일 황제를 겸하게 되었으며, 프로이센의 재상은 독일 제국의 재상이 되는 등, 프로이센이 곧 독일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엄격히 따지자면, 프로이센은 독일 제국을 구성하는 하나의 왕국이지만, 본 포스팅에서는 독일과 프로이센을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는 것으로 한다.

주2. 트라이 카이저 동맹은 1873~1886까지 지속되었다. 동맹의 목적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발칸 반도에서 각자의 영향권 안에 있는 지역에 대해 서로 합의하게 함으로써 독일과 이웃한 이 두 나라 사이의 적대감을 완화하고, 독일의 숙적인 프랑스를 고립시키자는 것이었다. 동맹국 가운데 어느 한 나라가 제3의 강대국과 전쟁을 치르는 경우, 나머지 두 나라는 우호적 중립을 유지하기로 되어 있었다.

참고문헌
1. The struggle for mastery in Europe/ Taylor, A.J.P. /  Clarendon Press / 1971
2. A Diplomatic History of Europe Since the Congress of Vienna , 유럽 외교사 / Rene Albrecht-Carrie , 김영식, 이봉철 역 / 도서출판 까치 /  1985

by 키치너 | 2008/01/31 15:02 | - 일차 세계대전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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