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1월 16일
신성 동맹(Holy Alliance) - 근대에 나타난 마지막 중세의 반동?
"들어보셨습니까? 신성동맹"
신실한 종교인을 자부하며, 그닥 겸손함을 겸비하지 못한 이라면 자신이 구상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그가 믿는 신의 가호를 서리기를 바라마지 않을 것이다. 이 이름만으로도 뭔가 해당 종교를 믿는 이들에게 아릿아릿한 감정을 불러올 것만 같은 이 "동맹"은 이름 그대로 '신의 이름으로 세계-물론 그들의-의 질서를 세우며, 세계의 주권을 다시 신에게로 돌리'려는 거대한 역사적 반동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1815년, 그 무시무시했던 "혁명 프랑스"의 대괴수™ 나폴레옹을 유럽의 정치사에서 퇴장시킨 러시아의 짜르 알렉산드르 1세는 유럽 외교 무대에서 강력한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 것은 그에게 '신'이 내려준 사명을 실현할 기회였다. 무법자™프랑스를 무릎 꿇리고, 유럽에 영광이 가득했던 옛질서를 다시 가져온 러시아의 짜르는 "영혼의 동맹"이 가능하다고 믿는 독신자였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사고는 알렉산드르 1세만의 전유물은 아니었고, 당시 유럽 사회엔 과격한 기독교 부흥에 관한 이론들이 횡행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주창자로는 신정정치를 이상으로 제시한 '무명의 철학자' 생 마르탱, '노발리스' 하르덴베르크 백작, 바아더, 크뤼데네 부인이 있는 데, 이들은 알렉산드르 1세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아무튼, '성서'의 가르침대로 지상에 평화를 구축하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확신하게 된 알렉산드르 1세는 그것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는 데, 그는 파리에 입성한 후 "혁명 광장-현 콩코르드 광장-"에서 연합군을 사열하면서 루이 16세를 처형한 그 자리에 제단을 설치하고 목사들로 구성된 7개 연대로 하여금 합창가를 부르게 했다. 그는 직접 제단에 나아가 기도하였고, 뒤이어 프랑스 장군들은 앞 다투어 러시아의 십자가에 입맞추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신의 사명을 받았음을 느꼈으며 프랑스의 불행(?)을 구제해야 된다고 확신하였는 데, 이 와중에서 그는 크뤼데네 부인을 만나 그의 종교적 열정을 정치적인 활동으로 옮길 것을 다짐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르 1세는 크뤼데네 부인과의 만남에서 마치 목자를 만난 양인양 감동의 눈물을 흘렸으며, 그와 크뤼데네 부인 사이의 대화를 기록한 크뤼데네 부인의 딸 줄리에트의 일기에서는 두 사람이 주로 몇 가지 주제에 대한 집중적인 대화를 나눴다고 전해진다. 그것은 바로 교회를 다시 재건해야 된다는 것, 기독교 정신으로 인류를 구제해야 된다는 것, 이런 위업을 이룩할 수 있는 사람은 알렉산드르 뿐이라는 것, 그리고 패전국인 프랑스를 다시 구원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점차 알렉산드르 1세는 인류를 구원해야 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는 데, 그에게 인류의 구원에 대한 사명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준 사건이 있었다. 1815년 9월 11일 베르튀(Vertus) 근처의 평야에서 15만 러시아 군대의 사열에서 알렉산드르 1세는 프로이센의 빌헬름왕과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황제를 양 옆에 둔 자리에서 전 군의 미사를 진행했고, 그는 스스로 연출한 이 광경에서 장엄함과 숙명을 느꼈다. 탕아가 되버린 "교회의 맏딸" 프랑스에 대한 깊은 연민과 구원에 대한 고민, 고양된 종교적 열정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신성동맹"의 구상이 구체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알렉산드르 1세가 신성동맹의 초안을 사람들에게 최초로 보여 준 것은 1815년 9월 18일경이었다. 다음날 알렉산드르 1세는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에게 이 초안을 보냈고, 프로이센의 국왕, 빌헬름도 곧 이 초안을 받았다. 프란츠 황제는 조약안이 탐탁하지 않다고 메테르니히에게 말했고, 메테르니히 역시 조약안을 보고선 ,조약으로서는 성립될 수 없는 내용이라고 판단했다. 프로이센의 빌헬름왕역시 같은 의견이었는 데, 그들은 신성동맹은 "종교의 외투 밑에 있는 박애의 열망"에 불과한 것이라고 혹평하였다. 이런 반응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르는 초안의 일부 문구를 수정하는 것으로 신성동맹을 어떻게든 성립시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전문(前文)과 3개 조항으로 구성된 매우 간략한 문건인 신성동맹의 조약문은 메테르니히에 의해 수정되었는 데, 메테르니히는 현실적인 그리고 보수적인 그의 입장에서 이 조약문을 수정했으나, "성경"의 말씀을 현실의 정치세계에 접목시킨 신성동맹의 조약의 기본성격마저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前文. 지난 3년을 특징지었던 대사건들의 결과로, 특히 신의 섭리에만 신념과 희망을 둔 국가들에게 내려진 축복의 결과로, 열강들이 그 상호관계에 있어서 채택되어야 할 방향은 우리들 구세주의 성스러운 종교가 가르치는 숭고한 진리에 입각할 필요가 있다고 깊은 확신을 얻게 되었다. 이 문서는 온 세상 앞에 자국의 운영에 있어서나 다른 정부와의 정치관계에 있어서나, 신성한 이 종교의 가르침, 정의의 가르침, 사랑과 평화의 가르침- 이들 가르침은 인간의 제도들을 공고히하고 그 불완전한 것을 교정하는 유일한 수단으로서 오로지 사생활에만 적용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 반대로 군주들의 결의들과 행동에 직접 미쳐야 하는 데 -을 그들의 유일한 지침으로 삼는다는 확고한 신념을 알리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음을 엄숙히 선언하면서 세 군주들은 다음의 조항들에 합의한다.
1조. 모든 인간은 서로 형제라고 가르친 성경 말씀에 따라서 세 군주들은 진실하고끊을 수 없는 우애의 결속으로 단결되어 있고 세 군주들은 서로가 같은 나라의 사람들이라고 간주함으로써 어떤 경우나 또 어디에서나 서로 원조와 지원을 보내 주며 자신들은 자국의 신민과 군대에 대하여 가장(家長)으로 자처하여 세 군주들이 종교, 평화 그리고 정의를 보호하려고 하는 그런 박애의 정신으로 이들 신민과 군대를 지도한다.
2조. 따라서 체약국 정부나 그들 신민이나 그 사이에 유일하게 효력을 갖는 원칙은 서로 원조를 제공하는 원칙, 변함없는 선의로써 상호 애정을 서로 표시하는 원칙, 같은 기독교 국민의 구성원이라고 서로 간주하는 원칙인 것이다. 세 군주들은 신의 섭리에 의하여 한 가족의 세 분파 즉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를 통치하도록 위임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함으로써 자신둘과 자신들의 신민들은 기독교 국민의 일부에 불과하며 이 기독교 국민들은 실제로 모든 권력이 귀속되는 신 이외에는 어떠한 주권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바이다.
3조. 생략
아이러니컬하게도, 위와 같이 종교적인 관점으로 현실 정치를 바라본 "신성동맹"에 대해 교황은 이러한 종교적인 동맹에 가입할 수 없다는 입장을 처음부터 분명히 하였다. 또한 미국은 1816년 3월, 알렉산드르로부터 가입을 요청받은 이래 계속 가입을 미루다가, 1820년 국무장관 애덤스가 미국은 유럽체제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기본정책이라고 가입 거절을 분명히 함으로써 신성동맹의 일원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영국역시 당시 섭정이었던 조지(이후 조지 4세)가 신성동맹에 대한 혹평에 가까운 카슬레이의 보고와 동맹의 숭고한 정신에는 찬성하지만 영국 헌정의 전통에 따라 섭정이 조약의 가입을 결정할 수 없다는 수상이었던 리버풀의 의견에 따라 가입을 거절하였다.
조약의 완성은 오래걸리지 않았지만 애초에 탐탁지 않게 생각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반대로 조약문의 정식 발표는 계속 미뤄지다가 세 군주가 적당한 시기라고 서로 동의하는 시점에 가서 발표하기로 합의가 되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가 그의 군대와 함께 러시아에 돌아오게 되자, 그는 자신이 구세주라는 것을 국민에게 보여주고 싶었고, 그의 신비주의 친구들에 경도되어 1815년 성탄절에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동의없이 일방적으로 신성동맹의 전문을 발표하게 된다. 그는 조약 전문의 공개와 동시에 자신의 조약 원안에 함축되어 담겨있던 사상을 길게 발표했다. 이러한 알렉산드르의 일방적인 행동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양국의 입장을 난처하게 하였다. 신성동맹에 대해 정부의 공식적인 발표보다도 언론에서 러시아에서 성탄절에 발표된 알렉산드르의 연설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여 다음해인 1816년 2월에, 『프랑크푸르트 신문』Journals de Francfort (2월 2일), 『세계 신보』 Moniteur universal (2월 6일)에서 각각 보도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1816년 11월 15일, 결국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던 메테르니히가 신성동맹에 대해 처음으로 입장을 밝혔다. 그는 신성동맹은 단지 원칙의 표명에 불과하며 군주들의 의사만을 표시한 것이고, 대신들의 부서도 없는 문서라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이런 문서로부터는 아무런 법률적 의무도 나오지 않고, 다른 동맹조약과는 달리 의무규정역시 존재하지 않는다고 천명하였다. 다시 말해, 오스트리아는 이런 신성동맹 조약에 의해 아무런 법적 구속도 받지 않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종교적 정신을 현실 정치에 이식하려 한 "신성동맹"은 당대에서부터 많은 해석과 논란, 그리고 평가가 있었다. 위에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영국의 카슬레이,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 겐츠는 신성동맹을 비판하고 냉소적인 태도를 가졌는 데, 카슬레이는 수상 리버풀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신성동맹 조약은 "숭고한 신비주의와 넌센스"라고 혹평했으며, 메테르니히는 그의 회고록에서 "공허하고 요란한 유물"이라고 일축했고, 겐츠는 신성동맹 조약이란 어떤 실제적인 목표를 갖고 있지 않으며 정치적으로 무효라고 규정하면서 "19세기 외교문서집 속에 괴이한 유물로 남을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이렇게 당시 주요국 정치인과 정책 결정자로부터 의미 부여는 커녕, 비웃음의 대상이었던 신성동맹은 이번엔 1820년 이후 19세기 자유주의의 가장 큰 적으로, 인민의 억압, 혁명 세력의 진압, 반민족주의의 대명사로 평가되었다. 이후, 영국의 필립스가 신성동맹의 긍정적인 측면을 최초로 부각시키려고 시도하면서 신성동맹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는 데, 제 1 차 세계대전 후 국제연맹의 창설을 계기로 국제기구의 선구적인 예로 찬양되기 시작하였으며, 제 2 차 세계대전 후 국제연합이 탄생되자 다시 국제기구의 선례로서 신성동맹이 각광받게 되었다.
분명한 것은. 짜르 알렉산드르 1세의 종교적 신념에 의해 탄생된 신성동맹은 이른바 "장기 19세기"의 전반기동안 유럽협조체제를 지탱하는 한축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유럽협조체제가 신성동맹만으로 유지된 것이 아니며, 장기 19세기동안 유럽내 불화와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당대의 평가처럼 혹평만으로 가득채워질 조약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Reference : 1. 세계외교사, 서울대 출판부, 김용구 ,2006
2. 유럽외교사(상), 까치, 르네 알브레히트-까리에 저/김영식, 이봉식 역, 1985
3. 제국의 종말 :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AD1848-1918, 가람기획, 타임라이프북스 저/김훈 역, 2005
신실한 종교인을 자부하며, 그닥 겸손함을 겸비하지 못한 이라면 자신이 구상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그가 믿는 신의 가호를 서리기를 바라마지 않을 것이다. 이 이름만으로도 뭔가 해당 종교를 믿는 이들에게 아릿아릿한 감정을 불러올 것만 같은 이 "동맹"은 이름 그대로 '신의 이름으로 세계-물론 그들의-의 질서를 세우며, 세계의 주권을 다시 신에게로 돌리'려는 거대한 역사적 반동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1815년, 그 무시무시했던 "혁명 프랑스"의 대괴수™ 나폴레옹을 유럽의 정치사에서 퇴장시킨 러시아의 짜르 알렉산드르 1세는 유럽 외교 무대에서 강력한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 것은 그에게 '신'이 내려준 사명을 실현할 기회였다. 무법자™프랑스를 무릎 꿇리고, 유럽에 영광이 가득했던 옛질서를 다시 가져온 러시아의 짜르는 "영혼의 동맹"이 가능하다고 믿는 독신자였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사고는 알렉산드르 1세만의 전유물은 아니었고, 당시 유럽 사회엔 과격한 기독교 부흥에 관한 이론들이 횡행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주창자로는 신정정치를 이상으로 제시한 '무명의 철학자' 생 마르탱, '노발리스' 하르덴베르크 백작, 바아더, 크뤼데네 부인이 있는 데, 이들은 알렉산드르 1세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아무튼, '성서'의 가르침대로 지상에 평화를 구축하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확신하게 된 알렉산드르 1세는 그것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는 데, 그는 파리에 입성한 후 "혁명 광장-현 콩코르드 광장-"에서 연합군을 사열하면서 루이 16세를 처형한 그 자리에 제단을 설치하고 목사들로 구성된 7개 연대로 하여금 합창가를 부르게 했다. 그는 직접 제단에 나아가 기도하였고, 뒤이어 프랑스 장군들은 앞 다투어 러시아의 십자가에 입맞추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신의 사명을 받았음을 느꼈으며 프랑스의 불행(?)을 구제해야 된다고 확신하였는 데, 이 와중에서 그는 크뤼데네 부인을 만나 그의 종교적 열정을 정치적인 활동으로 옮길 것을 다짐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르 1세는 크뤼데네 부인과의 만남에서 마치 목자를 만난 양인양 감동의 눈물을 흘렸으며, 그와 크뤼데네 부인 사이의 대화를 기록한 크뤼데네 부인의 딸 줄리에트의 일기에서는 두 사람이 주로 몇 가지 주제에 대한 집중적인 대화를 나눴다고 전해진다. 그것은 바로 교회를 다시 재건해야 된다는 것, 기독교 정신으로 인류를 구제해야 된다는 것, 이런 위업을 이룩할 수 있는 사람은 알렉산드르 뿐이라는 것, 그리고 패전국인 프랑스를 다시 구원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점차 알렉산드르 1세는 인류를 구원해야 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는 데, 그에게 인류의 구원에 대한 사명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준 사건이 있었다. 1815년 9월 11일 베르튀(Vertus) 근처의 평야에서 15만 러시아 군대의 사열에서 알렉산드르 1세는 프로이센의 빌헬름왕과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황제를 양 옆에 둔 자리에서 전 군의 미사를 진행했고, 그는 스스로 연출한 이 광경에서 장엄함과 숙명을 느꼈다. 탕아가 되버린 "교회의 맏딸" 프랑스에 대한 깊은 연민과 구원에 대한 고민, 고양된 종교적 열정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신성동맹"의 구상이 구체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알렉산드르 1세가 신성동맹의 초안을 사람들에게 최초로 보여 준 것은 1815년 9월 18일경이었다. 다음날 알렉산드르 1세는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에게 이 초안을 보냈고, 프로이센의 국왕, 빌헬름도 곧 이 초안을 받았다. 프란츠 황제는 조약안이 탐탁하지 않다고 메테르니히에게 말했고, 메테르니히 역시 조약안을 보고선 ,조약으로서는 성립될 수 없는 내용이라고 판단했다. 프로이센의 빌헬름왕역시 같은 의견이었는 데, 그들은 신성동맹은 "종교의 외투 밑에 있는 박애의 열망"에 불과한 것이라고 혹평하였다. 이런 반응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르는 초안의 일부 문구를 수정하는 것으로 신성동맹을 어떻게든 성립시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전문(前文)과 3개 조항으로 구성된 매우 간략한 문건인 신성동맹의 조약문은 메테르니히에 의해 수정되었는 데, 메테르니히는 현실적인 그리고 보수적인 그의 입장에서 이 조약문을 수정했으나, "성경"의 말씀을 현실의 정치세계에 접목시킨 신성동맹의 조약의 기본성격마저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前文. 지난 3년을 특징지었던 대사건들의 결과로, 특히 신의 섭리에만 신념과 희망을 둔 국가들에게 내려진 축복의 결과로, 열강들이 그 상호관계에 있어서 채택되어야 할 방향은 우리들 구세주의 성스러운 종교가 가르치는 숭고한 진리에 입각할 필요가 있다고 깊은 확신을 얻게 되었다. 이 문서는 온 세상 앞에 자국의 운영에 있어서나 다른 정부와의 정치관계에 있어서나, 신성한 이 종교의 가르침, 정의의 가르침, 사랑과 평화의 가르침- 이들 가르침은 인간의 제도들을 공고히하고 그 불완전한 것을 교정하는 유일한 수단으로서 오로지 사생활에만 적용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 반대로 군주들의 결의들과 행동에 직접 미쳐야 하는 데 -을 그들의 유일한 지침으로 삼는다는 확고한 신념을 알리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음을 엄숙히 선언하면서 세 군주들은 다음의 조항들에 합의한다.
1조. 모든 인간은 서로 형제라고 가르친 성경 말씀에 따라서 세 군주들은 진실하고끊을 수 없는 우애의 결속으로 단결되어 있고 세 군주들은 서로가 같은 나라의 사람들이라고 간주함으로써 어떤 경우나 또 어디에서나 서로 원조와 지원을 보내 주며 자신들은 자국의 신민과 군대에 대하여 가장(家長)으로 자처하여 세 군주들이 종교, 평화 그리고 정의를 보호하려고 하는 그런 박애의 정신으로 이들 신민과 군대를 지도한다.
2조. 따라서 체약국 정부나 그들 신민이나 그 사이에 유일하게 효력을 갖는 원칙은 서로 원조를 제공하는 원칙, 변함없는 선의로써 상호 애정을 서로 표시하는 원칙, 같은 기독교 국민의 구성원이라고 서로 간주하는 원칙인 것이다. 세 군주들은 신의 섭리에 의하여 한 가족의 세 분파 즉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를 통치하도록 위임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함으로써 자신둘과 자신들의 신민들은 기독교 국민의 일부에 불과하며 이 기독교 국민들은 실제로 모든 권력이 귀속되는 신 이외에는 어떠한 주권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바이다.
3조. 생략
아이러니컬하게도, 위와 같이 종교적인 관점으로 현실 정치를 바라본 "신성동맹"에 대해 교황은 이러한 종교적인 동맹에 가입할 수 없다는 입장을 처음부터 분명히 하였다. 또한 미국은 1816년 3월, 알렉산드르로부터 가입을 요청받은 이래 계속 가입을 미루다가, 1820년 국무장관 애덤스가 미국은 유럽체제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기본정책이라고 가입 거절을 분명히 함으로써 신성동맹의 일원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영국역시 당시 섭정이었던 조지(이후 조지 4세)가 신성동맹에 대한 혹평에 가까운 카슬레이의 보고와 동맹의 숭고한 정신에는 찬성하지만 영국 헌정의 전통에 따라 섭정이 조약의 가입을 결정할 수 없다는 수상이었던 리버풀의 의견에 따라 가입을 거절하였다.
조약의 완성은 오래걸리지 않았지만 애초에 탐탁지 않게 생각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반대로 조약문의 정식 발표는 계속 미뤄지다가 세 군주가 적당한 시기라고 서로 동의하는 시점에 가서 발표하기로 합의가 되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가 그의 군대와 함께 러시아에 돌아오게 되자, 그는 자신이 구세주라는 것을 국민에게 보여주고 싶었고, 그의 신비주의 친구들에 경도되어 1815년 성탄절에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동의없이 일방적으로 신성동맹의 전문을 발표하게 된다. 그는 조약 전문의 공개와 동시에 자신의 조약 원안에 함축되어 담겨있던 사상을 길게 발표했다. 이러한 알렉산드르의 일방적인 행동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양국의 입장을 난처하게 하였다. 신성동맹에 대해 정부의 공식적인 발표보다도 언론에서 러시아에서 성탄절에 발표된 알렉산드르의 연설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여 다음해인 1816년 2월에, 『프랑크푸르트 신문』Journals de Francfort (2월 2일), 『세계 신보』 Moniteur universal (2월 6일)에서 각각 보도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1816년 11월 15일, 결국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던 메테르니히가 신성동맹에 대해 처음으로 입장을 밝혔다. 그는 신성동맹은 단지 원칙의 표명에 불과하며 군주들의 의사만을 표시한 것이고, 대신들의 부서도 없는 문서라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이런 문서로부터는 아무런 법률적 의무도 나오지 않고, 다른 동맹조약과는 달리 의무규정역시 존재하지 않는다고 천명하였다. 다시 말해, 오스트리아는 이런 신성동맹 조약에 의해 아무런 법적 구속도 받지 않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종교적 정신을 현실 정치에 이식하려 한 "신성동맹"은 당대에서부터 많은 해석과 논란, 그리고 평가가 있었다. 위에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영국의 카슬레이,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 겐츠는 신성동맹을 비판하고 냉소적인 태도를 가졌는 데, 카슬레이는 수상 리버풀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신성동맹 조약은 "숭고한 신비주의와 넌센스"라고 혹평했으며, 메테르니히는 그의 회고록에서 "공허하고 요란한 유물"이라고 일축했고, 겐츠는 신성동맹 조약이란 어떤 실제적인 목표를 갖고 있지 않으며 정치적으로 무효라고 규정하면서 "19세기 외교문서집 속에 괴이한 유물로 남을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이렇게 당시 주요국 정치인과 정책 결정자로부터 의미 부여는 커녕, 비웃음의 대상이었던 신성동맹은 이번엔 1820년 이후 19세기 자유주의의 가장 큰 적으로, 인민의 억압, 혁명 세력의 진압, 반민족주의의 대명사로 평가되었다. 이후, 영국의 필립스가 신성동맹의 긍정적인 측면을 최초로 부각시키려고 시도하면서 신성동맹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는 데, 제 1 차 세계대전 후 국제연맹의 창설을 계기로 국제기구의 선구적인 예로 찬양되기 시작하였으며, 제 2 차 세계대전 후 국제연합이 탄생되자 다시 국제기구의 선례로서 신성동맹이 각광받게 되었다.
분명한 것은. 짜르 알렉산드르 1세의 종교적 신념에 의해 탄생된 신성동맹은 이른바 "장기 19세기"의 전반기동안 유럽협조체제를 지탱하는 한축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유럽협조체제가 신성동맹만으로 유지된 것이 아니며, 장기 19세기동안 유럽내 불화와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당대의 평가처럼 혹평만으로 가득채워질 조약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Reference : 1. 세계외교사, 서울대 출판부, 김용구 ,2006
2. 유럽외교사(상), 까치, 르네 알브레히트-까리에 저/김영식, 이봉식 역, 1985
3. 제국의 종말 :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AD1848-1918, 가람기획, 타임라이프북스 저/김훈 역,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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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1월 31일
최근의 신변잡기
1. 지난 한주동안 모 사회 재단 산하 무상 진료 병원에서 일주일 간 자원봉사를 하고 왔습니다. 일전의 꽃동네 자원봉사와는 비슷한 점도 있었지만, 여러모로 더 생각할 것을 느낀 것 같습니다. 한 생명이 임종을 맞는 것을 처음으로 두 눈을 뜨고 지켜볼 수 있었고, "무엇을 해야하는 가"에 대해서 이성뿐 아니라 감성으로도 느낄 수 있었던 기회가 되었습니다.
(방학 내내 엉망이 되었던 라이프 사이클을 정상화 할 수 있었던 것은 덤 이군요. (...) )
2. 이사했습니다. 약 3년동안 지냈던 정들었던 집을 떠나 새로운 잠지리를 마련했습니다. 이제는 완전 독립 생활을 영위하게 되었으니, 좀 더 제 자신에게 엄격한 생활을 요구해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 군요. (이참에 직접 요리할 수 있는 가짓수나 늘려봐야 겠습니다 -_-;;)
3. 장기 19세기부터 2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역사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고 고민중입니다. 사실 대충 여기에 대해서 뼈대를 잡은 건 이웅현 교수님의 "외교사"강의덕분이었는 데, 그때로부터 시간도 꽤나 지났고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에 대해서 새삼 의문이 생긴 것도 있고 해서, 다시 공부 중입니다. 독일 중심으로 그려나가던 패권관계도를 영,프 쪽으로 옮겨놓고 보니 새로 고려할 점이 한둘이 아니네요 ㅠㅠ. 어느정도 정리 되는 대로 결과물을 포스팅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4. 제대로 감기에 걸렸습니다. 엊그제 메신저에서 장난스레 대화명을 "감기 걸리기 좋은 날"로 해두었던 것이 말이 씨가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고생중입니다. 감기들 조심하세요. ㅠㅠ
(방학 내내 엉망이 되었던 라이프 사이클을 정상화 할 수 있었던 것은 덤 이군요. (...) )
2. 이사했습니다. 약 3년동안 지냈던 정들었던 집을 떠나 새로운 잠지리를 마련했습니다. 이제는 완전 독립 생활을 영위하게 되었으니, 좀 더 제 자신에게 엄격한 생활을 요구해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 군요. (이참에 직접 요리할 수 있는 가짓수나 늘려봐야 겠습니다 -_-;;)
3. 장기 19세기부터 2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역사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고 고민중입니다. 사실 대충 여기에 대해서 뼈대를 잡은 건 이웅현 교수님의 "외교사"강의덕분이었는 데, 그때로부터 시간도 꽤나 지났고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에 대해서 새삼 의문이 생긴 것도 있고 해서, 다시 공부 중입니다. 독일 중심으로 그려나가던 패권관계도를 영,프 쪽으로 옮겨놓고 보니 새로 고려할 점이 한둘이 아니네요 ㅠㅠ. 어느정도 정리 되는 대로 결과물을 포스팅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4. 제대로 감기에 걸렸습니다. 엊그제 메신저에서 장난스레 대화명을 "감기 걸리기 좋은 날"로 해두었던 것이 말이 씨가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고생중입니다. 감기들 조심하세요. ㅠㅠ
# by | 2008/01/31 00:05 | 일상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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